2019/08/11

단어의 사생활 | 언어가 드러내는 우리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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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사생활 | 페니베이커 | 언어가 드러내는 우리의 민낯

‘글’과 ‘댓글’은 글을 쓴 사람의 ‘인격’

나는 인터넷상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조금이라도 짐작할 방법은 그 사람이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나 뉴스 사이트, 포럼, 기타 다양한 게시판에 쓴 글이나 댓글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상대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즉 상대에 대해 완전히 무지할 수밖에 없는 인터넷상에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건더기가 그 사람이 썼다고 생각하는 ‘글’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심결에, 그리고 습관처럼 남기는 글들이 익명이라는 무시무시한 탈을 쓴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웅덩이에 고이고 고여 글을 쓴 사람조차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숨은 캐릭터이자 사이버 인격이 된다. 비록 내가 쓴 글을 많은 사람이 그냥 지나치거나 대충 흘겨보면서 넘어갈지라도 결국 그것이 쌓이고 쌓여 인터넷에서 ‘나’를 대표하는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해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것들에 대해 누리꾼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한다. 전염병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한글파괴 현상과 외계어의 범람, 저속한 글들이 난무하는 현실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인터넷이 현대 사회가 앓는 만성 질환인 소통의 부재를 완화하는 긍정적 효과보다는 비방, 악담, 욕설 등 마음속에 욱여넣어 두었던 악에 찬 외침을 폭발시키는 스트레스 해소의 공간으로 전락한 것만 같아 씁쓸하다. 물론,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지나치게 참는 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병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이 부추기는 ‘막말’이 개인과 사회에 이바지하는 스트레스 해소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위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문명인의 가식과 위선을 인터넷이라는 또 하나의 현실에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만천하에 드러내는 작태는 추하면 추했지 아름다울 리는 없다. 물론 나라고 뭐 크게 다를 것은 없지만,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해서 글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들과 맞닥뜨리다 보면 한 줄기 차가운 분노와 그 분노를 집어삼키는 슬픔이 내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는 뜨악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내겐 짧게 쓰는 댓글 한 마디도 대수롭다. 타인이 쓴 글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초등학생 수준보다 못할 정도로 성의가 없거나, 한글파괴와 외계어가 난무하는 형편없는 글이라고 판단이 들면, 그 글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더라도 그냥 무시해 버린다(사실 읽어줄 만한 글에는 무성의하다는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기초적인 국어 표현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글은 없다). 예의상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런 글 중에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글을 잘 써도 내용이 천박하여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글이 있고, 글을 못 써도 내용이 순수하여 미소를 자아내는 글이 있듯, 이것은 글을 잘 쓰고 못 쓰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내 생각에는 글을 쓴 사람의 ‘성의’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즉, 인터넷에서 누군가에게 사람대접받고 싶다면, 최소한의 성의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들이 무시된 글을 읽었을 때, 글을 읽은 사람이 글을 쓴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에 대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그런 막글을 함부로 쓰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정중하고 우아하게 상대를 비난하는 글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그런 막글로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더럽히는 짓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능히 그러고도 남는 것이 사람이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누구라도 틀릴 수 있고, 나 역시 시시콜콜하게 그런 것들을 지적하는 좀팽이는 아니다. 내 글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성의’ 없이 막 쓰지는 않는다. 그럴 바엔 아예 글을 쓰지 않는다. 아무튼, ‘성의’ 없는 글은 도무지 읽을 생각이 코딱지만큼도 생기지 않는 것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다.

‘단어’가 우리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

인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데,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기만 해놨으니, 나도 별수 없는 녀석이다. 그런데 평소의 이런 나의 가치관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는, 너무나도 반갑고 고마운 책을 발견했으니 바로 사회심리학자 제임스 W. 페니베이커(James W. Pennebaker)가 쓴 『단어의 사생활: 우리는 모두, 단어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The Secret Life of Pronouns: What Our Words Say about Us)』이란 책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즉 ‘언어 지문’을 남김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그 지문을 따라 단서를 추적하여 분석하면 그 단어를 사용한 사람의 개인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이 책은 ‘글’뿐만 아니라 ‘말’까지 포함했다는 점에서 내 주장(벌써 잊어버렸을 것 같아 다시 말하자면, 인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이 그 사람의 ‘인격’이다!)보다 더 포괄적이지만, 단어 연구를 위한 컴퓨터 분석을 위해 대화, 연설 등 일상생활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을 ‘글’로 변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실험이 종이에 쓴 글, 채팅 기록, 인터넷에 올린 글 등 텍스트 자료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내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소통의 목적으로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나 연설, 기자 회견 등의 ‘말’뿐만 아니라 편지, 일기 등의 고전적인 글쓰기부터 SNS, 포럼, 블로그 등의 현대적인 글쓰기까지 모두 포함해서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는 그 사람의 성격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감정, 동기 등의 복잡한 심리 상태와 사회적 관계를 알아내는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 고로 그 사람이 사용한 단어를 분석하면 성별, 나이, 사회적 계층, 감정 상태, 정직성, 성격 유형, 지위, 격식을 차리는 정도, 서열 관계, 지도력, 인간관계의 질 등 한 사람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추리할 수 있다고 『단어의 사생활』은 말한다. 여기서 ‘글쓰기 치료’를 떠올리는 분들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점이 있는데, 그렇다면 사용하는 단어를 바꾸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 사회적 관계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니고,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들은 단어는 단지 그 사람의 심리 상태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는 거울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이것만 해도 놀라운 사실이지 않은가? ─ 노파심에 또 한 번 더 말하자면 ─ 인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내 생각이 그리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도록 감개무량하게도 이 책은 모든 수고와 나를 대신하여 훌륭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이 제시한 흥미로운 사실들은 거꾸로 말해 자신이 쓴 글을 통해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의 심리 상태와 성격, 사회적 관계 등도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사돈 남 말하는 격이지만, 이 책을 읽는 당신, 남을 험담하기 전에 자신이 한 말과 자신이 쓴 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뜻깊은 성찰의 시간을 꼭 가져보기 바란다.

The Secret Life of Pronouns: What Our Words Say About Us by James W. Pennebaker
<'단어'는 언어 지문이다>

‘나’라는 일인칭 단순 대명사에 숨겨진 무서운 비밀

흥미롭게도 『단어의 사생활』의 모든 장에 걸쳐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나’라는 일인칭 단순 대명사이다. 거짓을 탐지하려고 할 때 ‘나’라는 단어는 정직함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시이며, 부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보다 ‘나’라는 단어 사용의 빈도가 우울증을 더욱 정확히 예측한다. 단어 사용 스타일은 우리 정체성을 보여주는 일부임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이 책의 논지는 영어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이런 언어 특성이 기원전 5세기에 쓰인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서도 발견된다고 하는데, 나 같은 경우 굳이 그렇게까지 오래된 책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얼마 전에 읽은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의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을 살펴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멋대로 한 페이지를 골라 다시 읽어봤는데, 소름 끼치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앤드류 솔로몬의 글쓰기에는 1인칭 단수 대명사 ‘나’의 사용 빈도가 유난히 높은데, 그것은 조금 전에 언급한 ‘나’라는 단어의 사용이 우울증을 예측한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했다. 왜냐하면, 앤드류 솔로몬이 바로 우울증 환자이기 때문이다. 비록 번역된 책이라 원문을 분석했을 때보다 정확도는 떨어질 수 있지만, ‘나’의 사용 빈도가 높은 것이 ─ 저자가 우울증 환자임을 고려하면 ─ 오히려 번역의 정확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솔로몬의 책은 자아 성찰적인 면이 강한 만큼 어쩌면 ‘나’의 사용 빈도가 당연히 높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인생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나만한 정도의 조건으로 인생을 시작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만족스러워할 것이다. 살아오면서 기준으로는 좋았던 시절도 있었고 불행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 불행들은 내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인생이 좀 더 험난했더라면 나는 내 우울증에 대해 아주 다르게 이해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나를 절대적으로, 끊임없이, 아낌없이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이 계셨고 역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남동생과도 우애가 좋은 편이었다. 완전하다고도 할 수 있는 가정이어서 부모님의 이혼이나 심각한 싸움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진정으로 서로를 무척 사랑하셨고 이런저런 일로 가끔 다투긴 했지만 서로에 대한, 그리고 나와 동생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흔들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이나 중학교 시절에 인기 있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고교 시절 말쯤에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학업 성적은 늘 우수했다. (앤드류 솔로몬, 『한낮의 우울』, 61쪽, 민승남 옮김, 민음사)

‘단어’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그리고 ‘민낯’을 드러내는 ‘글쓰기’

무심결에,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이나 휘갈겨 쓴 글이 한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 인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나의 주장을 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가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글쓰기나 말하기 스타일은 상황에 따라, 그리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한다는 점에서 고정적 특성이 강한 ‘인격’을 반영한다는 나의 주장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하지만, 글이나 댓글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전제는 얼추 들어맞는다. 고로 ‘막글’이나 ‘막말’을 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그 사람의 인격이 더럽다고 지레짐작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심리 상태나 사회적 상황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막글’이나 ‘막말’을 내뱉게 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남들이 피하고 혐오하는 거칠고 험한 일을 하고, 혹은 거의 착취에 가까운 노예 계약으로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이나 사회로부터 동정은커녕 빈번히 무시당하거나 괄시당한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쌓이고 쌓여 무의식적으로 거친 언어를 통해 분출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타고 난 천성을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다. 도둑놈에게도 경찰 제복을 입혀놓으면 보란 듯이 도둑을 잡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번지르르한 말과 그럴싸한 글로 사람들을 홀라당 속이는 위선자는? 이렇게 생각하면 인터넷에 올리는 ‘글’과 ‘댓글’로 그 사람의 ‘인격’을 멋대로 재단해버리는 일이 얼마나 오만하고 위험한 일인지, 새삼스레 깨달을 수밖에 없다. 내 주장은 허무맹랑하다 못해 편견과 선입관을 부추기는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었으니, 쑥스럽다 못해 쥐구멍에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다. 장광설을 내뱉고, 스스로 그것을 무너뜨리니 바보가 따로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단어의 사생활』은 여기까지만 알려준다는 점이다. 단어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심리 상태이고 어떤 사회적 상황인지, 그리고 왜 그러한 심리 상태와 사회적 상황에 부닥쳤는지, 무엇이 그러한 상황을 유발했는지 등 좀 더 세밀한 부분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관심 사항,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는 무언가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넌지시 말해줄 뿐, 좀 더 자세한 정황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말해주지 않는 것인지, 말해주고 있지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편지나 일기 등 종이에 글을 쓰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이메일, SNS, 블로그 등 인터넷의 보급으로 오히려 예전보다 글을 쓰는 일이 많아진 요즘, 페니베이커 같은 학자들은 더 쉽고 빠르게 자료를 모으고, 그 많은 자료를 컴퓨터 단어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후속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다면, 우리는 단어가 우리에 대해 시사하는 것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날도 멀지 않다. 이런 분야의 연구가 더 널리 알려진다면, 앞으로 신입생이나 직원을 뽑을 때, 수필이 필수 항목이자 중요한 잣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결혼 중매사이트에서 짝을 찾을 때도 마치 궁합을 보듯 구혼자들의 언어 스타일 일치도를 분석하여 짝을 지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SNS나 블로그, 게시판 등에 글을 남긴다는 것이 사뭇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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