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18

광기와 문명 | 멀고도 가까운 당신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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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문명 | 앤드류 스컬 | 멀고도 가까운 당신의 이름은 광기

내 해석은 정신의 의학에게 받아 마땅한 것을 주고자 하면서도 받아 마땅한 것보다 더는 주지 않고자 하는 해석이 될 것이며, 우리가 광기에 따르는 불행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는커녕 광기의 뿌리라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직도 얼마나 멀었나를 강조하는 해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광기에는 어떤 한 묶음의 의미와 관습에도 견줄 수 없이 커다란 사회 • 문화적 특징과 중요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해석이 될 것이다. (p21)

세상이 미쳤을 때

한국의 모던록 밴드이자 내가 즐겨 듣는 노래 <1/10>, <유자차> 를 부른 브로콜리 너마저(broccoli, you too>)가 2010년 발표한 2집 앨범의 타이틀곡 <졸업> 은 ‘이 미친 세상에’라는, 단순 명료하지만 다소 불손한 가사에 막막한 미래를 앞둔 대학생들의 불안과 분노를 집약시켰다. 한편, 파괴적인 장소라는 이유로 정신병원을 맹렬히 반대한 스코틀랜드의 정신과의 로널드(R. D. Laing) 랭은 정신분열증이란 그가 미친 세계라고 공표한 세계에 맞닥뜨린 최고 제정신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제대로 미치지 않은 대학생들은 노래를 부르며 무지막지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암울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삭히고, 우리가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이 미쳤다며 자신들은 그저 그런 미친 세상에 적응한 것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세상이 미친 것일까? 정말로 세상이 미칠 수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미친 것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세상이 미쳤을 때가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굳이 멀리 되돌아갈 필요도 없다. 난징대학살, 베트남 전쟁, 한국 전쟁, 세계 1 • 2차 대전,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 그리고 앞에 언급한 사건들만큼은 유명하지는 않지만, 전쟁에 열정을 쏟아붓느냐 궁핍해진 정부가 정신병원 예산을 삭감함으로써 환자의 1/3을 간접적으로 살해한, 충분히 ‘약한 말살’이라고 불릴만한 조치도 있다. 그리 놀랄 것도 없지만, 분명히 사회, 민족, 국가, 혹은 세상 전체가 미칠 때가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세상이 미쳤을 때, 광기는 인류가 자부하는 문명의 범주에서 크게 비켜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악한 일부는 광기를 발산하는데 문명의 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나치의 산업적이고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학살 시스템은 문명의 진보가 없었다면 절대 실현될 수 없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한순간에 폭망시켰던 원자 폭탄은 ─ 보는 사람의 눈을 한순간에 멀게 하는 핵폭발 순간의 그 강렬한 섬광만큼이나 ─ 첨단 과학의 눈부신 상징 중의 상징이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일사불란한 학살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인류 문명이 집약된 원자 폭탄 발사 스위치를 누른 장본인들이야말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자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자부하는 문명인이지 않았던가?

‘광기’, 그것은 ‘문명’의 지울 수 없는 일부!

‘광기’와 ‘문명’, ‘어딘지 모르게’가 아니라 확연하게 서로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처럼 들린다. 인류는 지구상에서뿐만 아니라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로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기반으로 한 언어로 소통하는 지능적 동물이다. 인류는 자연을 마냥 착취하는 야만적인 수준을 넘어서 자연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는 훌륭한 기술과 뛰어난 능력, 그리고 집요한 의지까지 고루 갖췄다. 이로써 지속가능한 착취를 달성하고자 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인 인류의 야무진 염원은 달성된 셈이다. 오래전에 지구를 야심 차게 정복한 인류는 이제 태양계 넘어 광활한 우주를 넘보며 군침을 흘릴 정도로까지 진보했다. 강아지가 주인 손에 들린 뼈다귀를 탐내며 침을 질질 흘릴 수는 있다지만, 지구상의 그 어느 생명체가 감히 우주를 바라보며 그 경이로움에 감명받은 나머지 입을 떡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릴 수 있단 말인가. 실정이 이러한데, 감히 그 누가 인류와 인류가 이룩한 문명을 보고 ─ 실성한 자가 아니고서야 ─ ‘광기’라는 불경한 단어를 떠올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여기 바로 그 실성한 자가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광기와 문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니, 차마 문명인으로서는 입에 언급하는 것조차 민망하고 지성인으로서는 충분히 대경실색할만한 그의 주장은 제대로 실성한 자가 아니고서야 할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광기로 뒤덮인 세상을 광기 없이 온전하게 통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의 실성은 이유 있는, 지적으로 우아하고 용기가 가상한 실성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말본새가 막 나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실성한 자라고 소개했지만, 진짜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앤드류 스컬(Andrew Scull)이 야심 차게 집필한 『광기와 문명(Madness in Civilization): 성경에서 DSM-5까지, 문명 속의 광기 3000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문명과 광기의 관계는 우리의 상상과는 정반대다. 우리의 바람대로 광기는 그저 문명의 끄트머리, 혹은 그 반대편, 혹은 그 변방에 존재하는, 문명의 우수리처럼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아니다. 예로부터 광기는 화가, 극작가, 소설가, 작곡가, 성직자, 의사, 과학자의 중심적인 관심 주제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광기로 가득 찬 연극이나 영화를 우리는 즐겨 본다. 특히 광기가 지독하게 들린 살인자를 소재로 한 섬뜩한 공포 영화를 보는 관객은 환호하고 전율에 떨며, ‘이 미친 세상에’ 얼마 안 되는 기분전환 거리로 삼는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광인은 사회에 만연한 허영, 가식, 부조리를 비꼬고 까발리고 풍자하여 대중의 꽉 막힌 심중을 활명수처럼 뚫어주는 없어서는 안 될 소재다. 스컬의 말처럼 광기는 중요한 여러 면에서, 문명의 밖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지울 수 없는 일부이며, 우리 의식과 일상생활을 끈덕지게 침범하는 문제이고, 따라서 의식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동시에 절대 그렇지 않은 문제다.

<Engraving: 'Bethlehem Hospital' by R. White, See page for author / CC BY>

광기를 사회 • 문화적으로 재미나게 통찰한 책

저속하지만, 사회적 편견이 물씬 풍기는 단어 ‘광기’와 품위 있지만, 인류의 고독한 오만이 물씬 풍기는 단어 ‘문명’. 왠지 원수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 같은 두 단어는 사이좋게 각각 인류사의 한 단면씩을, 한쪽은 지극히도 비참하고 한쪽은 지극히도 찬란하게 대변한다. 그렇게 광기와 문명은 자신의 건재함과 위용을 칼춤을 추듯 뽐내고 견제하며 위태롭게 공존해왔다. 세상이 미친 듯이 너도나도 전쟁으로 뛰어들며 광기의 위세를 한껏 드러내면, 이에 질세라 문명은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그럴싸한 논리를 들이대며 첨단 과학의 온갖 잡다한 결과물로 세상을 초토화한다. 문명의 선봉에 섰다고 자부하는 국가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판단 아래 식민지 건설에 매진하고 있을 때, 광기는 문명사회에서는 드러내놓고 발산하기 어려웠던 강간, 살인, 폭력, 약탈 등의 야만적인 쾌락을 식민지 사회에서만큼은 위법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문명이 한 수 위인지, 아니면 광기가 한 수 위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류 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광기는 빠트릴 수 없는 핵심 조미료이다.

이것은 작금의 문명을 힘겹게 이끌어가는 인류를 이해하는 데도 역시 광기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문명과 광기 사이에 ─ 그것의 용도가 무엇이든 간에 ─ 보이지 않는 다리가 놓여 있다면, 그 다리의 길이가 길든 짧든 그것은 멀고도 가까운, 그런 마법의 다리다. 혹은,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유명한 경구처럼 문명이 ─ 재미 삼아서든 연구 삼아서든 ─ 광기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기에 가끔 문명이 광기에 휩싸이듯, 광기 역시 ─ 광인 특유의 무분별한 호기심 때문이든 아니면 아무 생각 없어서든 ─ 문명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봤기에 가끔 광기가 문명인 척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광기와 문명』은 광기와 문명의 문화 • 사회적 변천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접근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예부터 지금까지 피와 눈물, 살육과 복수, 갈가리 찢긴 도덕과 인간성 말살 등의 광기로 얼룩진 연극, 소설, 영화 등의 작품들이 ─ 아직 광기 근처까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잠재적으로 광기 보균자라 할 수 있는 ─ 대중의 흐느끼는 환호와 전율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광기’를 다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독자의 겸연쩍은 호기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광기는 인류의 야릇한 관심과 환호 속에서도 한편으로 비참한 대접을 받아왔다. 감호소와 전기경련치료(Electroconvulsive treatment, ECT), 전두엽 절제술(frontal lobotomy)로 대변되는 매우 문명적이고 사회적인 폭력의 압제를 묵묵히 견뎌야 했다. 신들린 자, 의지박약한 자, 퇴폐한 자, 사회의 찌꺼기라는 무지막지한 편견 속에서 광기는 자신의 존재를 꿋꿋하게 지켜왔다. 그리고 그 존재감은 광인 몇 사람이 의기투합하고 문명의 이기에서 도움을 얻어 자행된 테러에서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뿐인가? 미친 듯이 빠르고 거칠게 돌아가는 세상은 또 어떠한가? 이곳에서는 폭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지옥에 빠진 구제불능의 영혼처럼 울부짖고, 저곳에서는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한탄하는 노예처럼 신음하고 있다. 세상에 만연한 부조리와 불편한 진실을 따라가다 보면 문명이 광기에 오염된 것인지, 광기가 문명을 흉내 내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감히 문명과 광기의 경계를 긋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악마의 구슬림에 넘어간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실성한 자이거나, 그도 아니면 세상 남부러울 것 없는 바보천치다. 여전히 그 원인을 뾰족하게 밝히지 못한 광기는 여전히 문명의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기웃거리며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감히 충고하건대, 당신이 아직도 정신질환을 앓는 불행한 사람을 ‘의지가 박약한 자’, ‘인간쓰레기’로 낙인찍는 무식쟁이에다가 시대착오적인 사람이라면 그냥 이 책 『광기와 문명』을 가만히 내버려 두길 원한다. 당신처럼 변변치 못한 사람에게 이 책은 고작해야 광기가 문명 언저리에서 노닥거리다 남긴 반사회적인 흔적을 가십거리로 엮은 그렇고 그런 책정도로나 비칠 테니까. 하지만, 문명과 인류에 대한 보다 심연 하면서도 세밀한 이해에 목마른 독자라면, 인류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심연의 우주처럼 문명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 아니면 이해하기를 포기한 ─ 광기를 사회 • 문화적으로 이보다 재미나게 통찰한 책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꼭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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