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5

정신의학의 역사 | 정신병 치료, 괴담과 무엇이 다를까?

A-History-of-Psychiatry-book-cover
review rating

정신의학의 역사 | 에드워드 쇼터 | 정신병 치료, 괴담과 무엇이 다를까?

어느 선도적 생물정신의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신질환의 발현에서 심리적 • 사회적 요인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나, 생물학적 치료법 …… 의 심리적 요인을 간과하는 것이나, 임상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모두 어리석은 짓이다. (p466)

정신과 진료실 문을 당당하게 들어갈 수 없는 이유

자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반생을 살면서 아직 정신과 진료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 사실이 내가 어떠한 정신질환도 앓고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정신 상태가 비교적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이 ‘미친 세상에서’ 아직 정신과를 한 번도 찾아보지 않고 나름 잘 버텨온 것을 굳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상에서 알 수 없는 불안과 이유 없는 짜증을 동반한 발작성 우울함이 간혹 찾아온다는 것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뭐, 이 정도는 현대 도시 사회를 사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유행병 아닌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우울증 자가 진단 테스트’를 해보니 정상이지만 가끔 우울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몇 가지 문장으로 진행한 간단한 테스트임에도 이 얼마나 정확한 진단인가? 또한, 같은 사이트에서 다행스럽게도 조울증 테스트는 통과했지만, 공황장애 테스트는 12점으로 공황장애가 의심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마지막 결과를 놓고 보면 어쩌면 나도 한 번쯤 정신과를 찾아가야만 하는 수많은 고개 숙인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정신과 진료를 받으려고 마음먹는다면 치료 비용 문제보다 더욱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정신질환자’라는 낙인이다. 2017년도 기사에서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은 살면서 한 번 이상 정신질환 증세를 겪지만, 정신과 진료를 받은 사람은 전체의 10%도 안 된다는 조사 결과 역시 같은 이유일 것이다.

구글에서 ‘정신과진료’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 중 (광고를 제외하고)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것들은 죄다 정신과 진료를 받았을 때 받게 될 사회적 불이익(취직, 보험 가입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정신과 진료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나 간단한 소개, 혹은 개인이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 겪은 경험담보다는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을 때의 불이익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검색 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한다. 그것은 아직도 한국 사회와 한국인은 정신질환에 대한 말 못 할 두려움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검색 내용을 계속 살펴보면 전문가들은 실재적으로 불이익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사람들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볼멘소리로 말한다. 취업, 보험 가입 등의 문제는 둘째치고 정신과 진료를 몇 번 받았을 뿐인데 어느새 주변 사람들에겐 ‘정신질환자’라고 소문이 퍼진다면, 그래서 ─ 한국 사람의 소심한 성격상 대놓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 어딘지 모르게 예전과 사뭇 다른, 마지못해 배려하는 듯한 냉소적인 주변 사람들의 눈빛과 태도를 지속해서 받게 되면 없던 정신질환도 생길 수밖에 없다.

정신의학을 대하는 그 냉담함 속에 담긴 두려움

과거에는 ‘광기’라고 불리며 주변 사람들과 사회의 기피 대상이 되었고, 한때는 질병의 존재조차 부인되었던 정신질환을 다루는 정신의학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 같다. 정신의학을 대하는 한국인의 두려움과 혐오감 섞인 시선에는 불신과 냉대가 가득하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들이 자신들의 권위에 압도된 나머지 보다 적극적으로 ─ 그 뻣뻣한 고개를 좀 더 부드럽게 숙이고 ─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지 못한 소치이기도 하지만, 어느 문화를 가나 존재하는 ‘정신질환 = 광기’라는 케케묵은 공식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대중의 고지식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군데군데 오명과 불명예로 얼룩진 정신의학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정신의학을 대하는 현대인의 불신이 이유 없는 근거에서 비롯한 편견 때문만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나름 자업자득인 면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기 충격 요법(ECT)이 효과가 있지만, 그것이 왜 효과가 있는지 정신의학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공포 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악명 높은 전두엽 절제술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대장에 쌓인 독성물질이 정신질환의 원인이라고 생각되었을 땐 대장을 일부 혹은 통째로 제거하기도 했다. 하물며 그 끔찍했던 ─ 그러나 공포 영화 제작자에게 최상의 무대로 작용하는 ─ 수용소 시대는 어떠했던가?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가 막힌 치료법이 정신의학에서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행해졌으며, 다른 의학 분야의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괴담 같은 일화가 정신의학에서는 종종 등장한다.

그렇다고 정신과 의사들이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때 자행했던 그 악명 높은 실험처럼 사악한 의도로 그러한 일을 저질렀던 것은 절대 아니다. 개중에는 질병 치료보다는 정신의학의 전문적 권위를 먼저 앞세우고자 했던 의사도 있을 것이고, 개인 진료소를 열어 부자들의 두둑한 주머니만을 노리는 탐욕적인 의사도 있겠지만, 의사 대부분은 어떻게든 증상을 완화하여 환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더 나아가 병을 완치하여 환자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가 남은 삶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즉 의사로서의 직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권위, 이익, 치료 등 이 세 가지는 단순히 우선순위의 문제였을 수도 있겠으나, 그 위대했던 ‘도덕 치료’가 희망을 빛을 발산하던 시대가 잠시나마 유지될 수 있었고, 어떻게든 정신질환을 치료해 보겠다는 의사들의 일념 위로 우연과 행운이 포개지면서 정신약물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사이비 과학이라는 비난과 야유 속에서 부침에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정신질환자 치료에 더욱더 큰 의미와 우선순위를 둔 의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튼,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별별 시도를 해야 할 만큼 대부분의 정신질환이 가지고 있는 처참함과 치유할 수 없다는 절망을 의사들은 견뎌내기 어려웠고, 선정적인 기삿거리나 가십거리에 쉽게 놀아나는 대중이 의사들의 그런 고충을 헤아리기에는 ─ 예나 지금이나 ─ 지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무뎠다고 볼 수 있다. ─ 예나 지금이나 ─ 대중의 관심을 무엇보다 사로잡는 것은 거대한 붉은 벽돌집 안에서 행해지는 머리끝이 쭈뼛할 정도의 무서운 이야기가 전해주는 그 짜릿함이지, 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 어떠한 병을 앓고 있고 어떠한 치료를 받고 있는지, 그러한 환자와 대면하는 의사는 어떠한 삶을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하기에 대중은 광인을 바라볼 때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적당한 비율로 공존하는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광인을 다루는 정신의학 앞에서는 냉담하다. 그 냉담함 속에는 더는 광인을 오락거리로 이용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작금의 도덕적 잣대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이 담겨 있으면서도, 자신이 정신의학과 가까이함으로써, 즉 정신과 진료실로 자진 행차함으로써 자동으로 받게 될 오명과 낙인에 대한 두려움이 으스스하게 서려 있다.

수용소의 ‘도덕 치료’에서 약물치료까지

비교적 치우침 없이 정신의학 역사를 다뤘다고 생각되는 에드워드 쇼터(Edward Shorter)의 『정신의학의 역사(A History of Psychiatry): 광인의 수용소에서 프로작의 시대까지』를 읽고 몇 자 남긴다고 손이 가는 대로, 느낌이 지시하는 대로 적어봤더니, 장광설도 안 되는 잡글이 되고 말았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정신의학이 걸어온 역사를 되짚어보면 ‘의학’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난감하기 그지없다. 계몽주의의 과학적 사고방식과 낭만주의적 인도주의가 결합한 ‘도덕 치료’가 수용소에 적용될 때는 정신의학에 뭔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이것은 정신의학이 정신질환자를 기어코 치료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이자, 그럼으로써 의학의 한 분야로 당당하게 자리 잡겠다는 당찬 시도였다. 하지만, 수용소 의사들은 밀려드는 환자 앞에서 자신들의 무력함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그럼으로써 좋은 환경과 세심한 배려로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그들의 아름다운 의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때쯤이면 다른 분야에서는 과학적 합리주의가 꽃을 피우고, 일부에서는 그 열매를 따고 있었다. 이에 뒤질세라 정신의학 역시 1세대 생물정신의학(정신질환의 원인을 네 가지 체액(점액, 황담즙(담즙질), 혈액, 흑담즙(우울질))의 불균형에서 찾는 체액 이론)에서 벗어나 마음과 뇌의 연관 관계에서 찾기 시작한다. 정신의학 역사상 획기적인 반환점이 될 수도 있었던 1세대 생물정신의학은 곧 스스로 들고나온 잠꼬대 같은 이론인 ‘퇴행’ 이론에 철퇴를 맞는다. 잠시 주춤거리던 정신의학은 ‘퇴행’의 사례를 직접 보여주려는 듯, ‘정신분석’이야말로 모든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만능치료법이라고 약장수처럼 떠들며 스스로 사이비 과학에 빠져든다. 이로써 정신의학은 일반 의학으로부터 멀어지고 더불어 정신의학의 과학발전 역시 오랫동안 침체의 늪에 빠진다. 하지만, 대중이 열광했던 첫 번째 정신질환약 밀타운(Milltown)이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제약회사들은 정신질환 약물 개발에 발 벗고 나섰고, 정신의학은 다시 한번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불타오른다. 다만, 이번에는 그 방법이 ‘도덕 치료’가 아니라 ‘약물’이었다. 이로써 2세대 생물정신의학이 정신의학의 주류로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고, 정신약물학은 독보적으로 군림해오던 정신치료를 대체하게 된다.

A History of Psychiatry: From the Era of the Asylum to the Age of Prozac by Edward Shorter
<University of Liverpool Faculty of Health & Life Sciences from Liverpool, United Kingdom / CC BY-SA>

정신질환자의 증가,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

하지만, 『정신의학의 역사』는 갈지자걸음처럼 비틀거리는 정신의학의 장황한 역사를 설명하는 데만 의의를 둔 책은 절대 아니다. 물론 그 우여곡절 가득한 역사만으로도 매우 흥미롭고 인상적이다. ─ 쇼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 망각의 언저리를 맴도는 주요 인물들의 생생한 삶을 복권하고, 종종 순수한 과학의 승리라고 묘사되는 사건에 사실상 문화와 상업성이 어떻게 침투하였는지를 묘사하는 사회사로서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쇼터가 광인을 집단 감금한 수용소 시대부터 정신질환의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는 프로작(Prozac)까지의 짧지 않은 시간을 세심하게 집필한 것은 21세기 정신의학이 걸어가야 할 길을 묻고자 함이다.

한때 톰 소여는 모험심을 발휘해야 하는 사내아이들의 이정표였으나, 지금은 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로 진단해 버린다. 어느새 톰 소여가 뇌 손상이 있는 아이로 둔갑한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무서운 영화를 보거나 이야기를 듣고 무서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를 보고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까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내려버린다. 같은 방식으로 우울증의 범위도 확장됐다. 행복하지 않으면 전부 우울증 환자가 되어버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의 저자이자 그 자신이 우울증 환자인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이 지적한 것처럼 현대의 지나치게 빠른 삶의 속도, 기술 혁신이 가져온 혼돈,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소외감, 전통적인 가족구조의 붕괴, 풍토병이 되다시피 한 외로움, ─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분야를 총망라하여 과거에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제시했던 ─ 믿음 체계의 와해 등을 대표하는 현대성이 우울증 환자 증가의 한 원인이 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정신의학이 우울증의 질병 역치(불편함의 수준을 넘어 병에 해당한다고 간주하기 시작하는 증상의 심한 정도)를 낮추고, 제약회사의 과장 광고와 약 효과에 대한 소문에 현혹된 사람들이 단지 기분이 좀 나쁘고 짜증이 좀 난다는 이유로 처방전을 요구하고, 이에 발맞추어 진단을 남용하는 현실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약회사가 치료제를 내놓을 때마다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질병이 전염병처럼 유행을 타는 것은 또 어떠한가?

바리움이 등장했을 때, 불안을 치료할 효과적인 약이 존재하게 되자 환자와 의사 모두는 온갖 문제를 불안이라는 용어로 정의하는 데에 기꺼이 동참했다. 우울증을 치료할 프로작이 등장하자 이제는 우울증이 주인공이 되었고 우울증은 모든 종류의 스트레스에 대한 검증표가 되었다. (『정신의학의 역사』, p521~522)

이렇게 되면, 21세기에 와서 정신질환자가 증가하는 현상이 앤드류 솔로몬의 지적처럼 우리를 끊임없이 압박하는 현대성 때문인지, 아니면 제약회사의 탐욕과 정신의학의 기만이 교묘하게 뒤섞인 합작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또한, 특정 질환을 진단하는 기준이나, 기존에는 그냥 가벼운 증상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새로운 질병으로 등록되는 것이 ─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강력한 로비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탄생한 것처럼 ─ 로비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하니, 앞서 말했던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은 살면서 한 번 이상 정신질환 증세를 겪는다는 조사도 믿기가 어렵다.

마치면서...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신의학은 정신질환자를 약물로 길들이려고 하는 하얀 수의를 입은 과학의 탈은 쓴 조련사인가? 한때 정신의학이 야심 차게 걸었던 ‘도덕 치료’ 같은 진정으로 정신질환자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의사-환자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관계는 처방전 발급기로 전락한 정신과 의사로 말미암아 완전히 소멸한 것인가? 또한, 정신질환이 뇌과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약물로 치료하거나 제어할 수 있다면, 정신질환은 그 자리를 뇌를 포함한 모든 신경계에 관해서 연구하는 신경과 의사에게 반납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신경매독은 내과 의사에게, 지적장애(정신지체)는 소아청소년과 의사에게, 뇌졸중은 신경과 의사에게 넘어간 것처럼 말이다. 만약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기반을 잃다 보면 과연 정신과 의사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앞으로 정신과 의사가 치료할 수 있는 질병 같은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한마디로 『정신의학의 역사』는 자기 앞길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여기저기 휩쓸리는 정신의학에 대한 강력한 질타이나 쓰디쓴 충고이다. 내 비록 정신의학에 몸담고 있지는 않지만(만약 그렇다면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래도 명색이 의사인데 말이다), 그들이 한때 보여주었던 ‘도덕 치료’라는 인류애의 절정이 다시 한번 이 척박한 땅에 재림하는 날을 고대하며, 그리고 수용소의 붉은 벽돌 뒤에서 행해지는 잔혹한 실태를 고발한 ─ 그래서 한때 反정신의학 운동의 밑거름이 된 ─ 대중문화를 한낱 가십거리로만 받아들였던 나의 완벽한 무지함을 반성하며, 마지막으로 정신과 진료실을 방문하지 않는 날이 절대로 오지 않기를 학수고대하며 넌더리 나도록 길고도 길었던 오늘의 리뷰를 마친다.

0 comments:

댓글 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재됩니다.
본문이나 댓글을 정독하신 후 신중히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