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 수용소 | 랭던 길키 | 지성조차 이기심에 묶여야만 하는가
과연 우리는 지혜와 명철, 도덕적 힘을 최대한도로 발휘하여 굶주리는 세상과 우리의 것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 쌓아놓고 자기 배만 불리며, 인간성과 평화로운 세계 공동체를 얻을 수 있는 희망을 다 던져버릴 것인가? (p445)
젊은이답지 않은 지적 날카로움으로 완성한 회고록
2차대전 때 일본은 중국 점령지역에 있던 영국인, 미국인 등의 외국인들을 위현(현재는 산둥)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 당시 북경 연경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랭던 길키(Langdon Gilkey) 역시 2년 반 동안 수용소 생활을 경험한다. 남부럽지 않은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자랐던 그에게 수용소 생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참하고 고단했던 수용소의 일상 속에서 젊은이다운 왕성한 호기심, 그리고 젊은이답지 않은 지적 날카로움이라는 혜안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인간의 성품과 도덕성에 대한 예리한 성찰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 『산둥 수용소(Shantung Compound)』이다. 길키는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현대적 낙관주의에 자부심을 느끼고 인간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낙관적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수용소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믿었던 낙관주의가 도를 넘어선 순진함과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에 입각한 터무니없는 망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인간의 성품과 도덕성에 대한 흠집 정도를 넘어서 그 존재 자체와 근원적인 본질에 대해 뇌 속까지 파고들 정도로 깊은 회의를 품게 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이기심’이다.
굶주림은 문명의 모든 가면을 벗겨버린다
평소에 누렸던 물질적 풍요와 안락함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수용소 사람들은 입소 당시만 해도 그토록 끔찍하게 여겨졌던 환경에 놀랍게도 몇 개월 만에 적응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특유의 창조적인 활력을 발휘하여 쓰레기장 같았던 수용소를 사람이 살 만한 그럴듯한 공간으로 여겨지게끔 탈바꿈시킴으로써 이들은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일상’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수용소에서 창출한 ‘일상’은 어떤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적응하고 더 나아가 개척하려는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증명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수용소의 식량 부족 문제가 표면적으로 불거지면서, 그리고 식량 문제가 앞으로 개선될 여지는커녕 현재의 배고픔이 지속적으로 장기화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자 수용소 사람들의 이기심은 폭발해버리고 만다.
군자도 굶주리면 붓을 내팽개치고 이빨을 드러내며 짐승으로 변하듯, 수용소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굶주림은 그동안 인류 문명이 줄기차게 부르짖었던 지적 우월함, 교양, 민주주의, 그리고 도덕과 정의가 개미가 뀐 방귀에도 흩어지는 뜬구름 같은 환상이었음을 폭로한다. 특히 길키가 수용된 수용소는 필리핀이나 싱가포르 수용소에 있는 군인 포로들의 상황과는 천지 차이였다. 일본군의 잔혹한 통치 아래에서 하루하루 죽음의 임박함을 느꼈을 군인 포로들과는 달리 산둥 수용소에는 고문 • 폭력도 없었으며 굶어 죽는 사람도 없었다. 길키의 경험은 인류 문명의 도덕적 견고함이 약간의 빈곤만으로도 너무 쉽게 무너졌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사람이 굶주리면 얼마나 파렴치해질 수 있는지는 미국 적십자에서 보낸 구호품 배분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 적십자가 수용소에 보낸 (따로 수령인은 지정되어 있지 않은) 엄청난 양의 구호품은 수용소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된다면 최소 몇 개월 이상은 배고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당한 양이었다. 현명하게도 일본인 수용소 사령관은 미국인에게는 꾸러미 1.5개, 다른 국적 사람들에게는 꾸러미 1개씩을 배분함으로써 미국인의 자부심도 세워주고 다른 국적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하는, 누가 봐도 탁월한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7명의 젊은 미국인이 수용소 사령관을 찾아가서 미국 적십자가 보낸 물품을 미국 시민이 아닌 다른 국적 수감자들에게 배포하는 것은 직권 남용이라고 항변한다. 만약 미국인에게만 구호품이 배분된다면 미국인 한 사람당 꾸러미 7개씩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7명의 젊은이가 어떠한 마음에서 수용소 사령관을 찾아간 것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의제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수용소 사령관은 심사숙고 끝에 모든 사람에게 꾸러미 1개씩을 배분하고 나머지는 다른 수용소로 보내기로 한다. 7명의 미국인 때문에 200명의 미국인은 꾸러미 반 개씩을 잃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나머지 193명은 억울했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7명의 미국인 행동이 비도덕적이고 탐욕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했던 길키(길키 역시 미국인이다)가 수용소 사령관의 최종 판결이 나기 전에 다른 미국인을 두루 만나며 의향을 타진해 본 결과 그들도 7명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고는 크게 실망하기 때문이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다만 이기적일 뿐이다
역사와 관련된 책들을 좀 읽은 사람이라면 맹자 말씀대로 사람은 선천적으로 착하다고 보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그렇다고 사람이 마냥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다만 이기적일 뿐이다. 그리고 인류가 자부하는 도덕심 역시 이기심이라는 변덕스러운 바다 위에 표류하는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 도덕적 기준은 표류하는 뗏목 위에 위태롭게 매달린 깃발이 된다.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고 떠다니는, 때론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거나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깃발과 뗏목 말이다. 만약 이처럼 고정된 도덕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보편적인 도덕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덕이 사람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멋대로 변용되고 변질할 수 있다면 도덕의 존재 자체를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세상을 축소해 놓은 듯한 수용소의 ‘일상’을 다룬 길키의 『산둥 수용소』는 사람이 물질적인 궁핍함에 처하면 바깥세상에서 쌓아 올린 명예, 명성, 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이성, 합리성, 도덕, 양심, 정의 등 인류 문명을 빛낸다고 여겨졌던 보편적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준다. 그래서 국가가 경제성장에 목매다는 것도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풍요와 만족을 국민에게 제공함으로써 사회에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관이 설 자리를 제공해주려는 의지와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는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사람의 탐욕과 이기심도 증가하거나 다양해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편중된 부는 또 다른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공산주의 사회가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이 역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사람을 도덕적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막상 행동으로 옮겼을 때 국가와 사회에 어떠한 재앙과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지 통한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관을 인류 문명 위에 확고하게 세운다는 것은 유토피아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혹자는 길키처럼 영적인 무언가에서 찾을 수 있지만, 당연히 난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1911년 산둥, Fisher, Daniel Webster, 1838-1913 / No restrictions> |
지성조차 이기심에 묶여야만 하는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약간의 물질적 빈곤만으로도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양심과 도덕의 허술함보다는 제삼자 처지에선 명백히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변명하고 온갖 잡다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합리화하려는 의지다. 종교인은 종교적으로, 변호사는 법적으로, 그 밖의 사람들도 바깥세상에서 쌓아온 경험, 지식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는 집요함은 역겹다 못해 구역질이 다 난다. 인간의 이기심은 단지 생존과 직결된, 혹은 탐욕을 부채질하는 물질적인 문제에서만 그 잔인한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자신이 하는 어떠한 행동도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떳떳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합리화 의지로서도 나타난다.
암울하고도 참혹한 상황에서도 인류를 구원해 낼 것이라 믿었던 지성과 의지조차 이기심을 위해 헌신하는 꼴을 보면, 정말 길키의 깨달음대로 우리는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도 나약하며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동물일지 모르겠다. 나 역시 이 책을 덮고, 그리고 오늘의 깨달음을 뒤로하고 내일이 오면 어느새 본연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으로 돌아가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정말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될까? 지난 2,000년 동안 종교가 신의 이름으로 인류와 그 이웃에게 자행한 온갖 잡다한 악행을 떠올려보면 종교 역시 인류처럼 미덥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어쩌면 길키가 고찰하고 성찰한 인류의 문제는 인류가 영원히 풀어야 할 숙제이자, 영원히 풀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다소 희망적인 것은 인류는 이러한 문제들을 인지하고 풀어낼 수 있는 지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 지성조차 이기심에 묶여 있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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