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 로버트 서비스 |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혜성처럼 사라진 혁명가
레닌의 후계자 경쟁에서 트로츠키가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장애물은 바로 그에게 최고 지도자가 되려는 강력한 욕망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p860)
권력 쟁취에 대한 빈약한 의지
레닌(Vladimir Lenin)의 뒤를 이은 권력 투쟁에서 왜 트로츠키(Leon Trotsky)는 스탈린(Joseph Stalin)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을까? 『트로츠키(Trotsky: A Biography)』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가 이 책보다 앞서 출판한 『스탈린(Stalin: A Biography)』을 읽으면서 내린 내 나름의 판단은 레닌 사후 권력 쟁취와 투쟁을 향한 트로츠키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언급하고 싶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혁명 의지와 세상을 도취시킬듯한 매혹적인 글을 쓰겠다는 의지는 당대의 그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충만했을지 몰라도,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만큼은 악다구니 같았던 스탈린과는 대조적이다. 트로츠키는 권력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했더라도 혁명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권력이 차지하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너무 소홀히 여겼던 것 같다. 혁명을 위해서든, 개혁을 위해서든, 한 국가를 자신의 신념대로 뜯어고치고 운영하려면 권력은 필수 불가결한 도구라는 현실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면 모두가 혁명의 대의를 풀고 한마음 한뜻으로 달려간다면 권력은 누가 쟁취하든 상관없을 정도로 순진했던 것일까? 이러했던 내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면서 앞선 판단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고, 아니나 다를까 로버트 서비스 역시 트로츠키는 권력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는 데 필요한 결단력과 의지가 없었다고 결론 내린다.
히틀러(Adolf Hitler)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폭발적인 연설 솜씨, 여러 해 동안 베스트셀러 작가였을 만큼 탁월한 작문 실력, 지옥이라도 엎어버릴 만큼 성난 군중을 달래 집으로 돌려보내는가 하면 패퇴하여 도망치는 오합지졸 같은 군인들을 설득하여 다시 전장으로 보내 싸우게 하는 대범한 용기와 뛰어난 대중 선동 능력 등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의 영웅으로 활약하여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던 트로츠키였지만, 결국에는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마오쩌둥(毛泽东, Mao Zedong), 장제스(蔣介石, Chiang Kai-shek), 히틀러, 스탈린 등 20세기에 이름을 날린 독재자들의 필수 미덕이었던 권력 쟁취에 대한 집념과 의지가 부족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트로츠키의 실패 원인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고상한 혁명가 트로츠키와 악랄한 혁명가 스탈린
그 석연치 않은 부분을 조금 메워보자면, 트로츠키도 스탈린처럼 충성을 바치는 측근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니었던 트로츠키는 권력 투쟁의 장에서 자신을 지지해주고 자신의 편에서 싸워줄 정치적 피후견인 집단은 일부러 만들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 셈이다. 혁명 전 그루지야에서 무장 강도단을 성공적으로 이끌던 스탈린은 이미 이 시절부터 나름의 자기 집단을 만들고 있었다.
능력보다 자신에 대한 충성도로 인선했던 스탈린과는 달리 트로츠키는 과거 행적이나 사상에 개의치 않고 능력 위주로 필요한 사람을 뽑았다. 트로츠키는 더러운 방식으로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이에 비해 스탈린은 주로 더러운 방법으로만 싸우려고 들었다.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이 결여된 트로츠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타협할 줄도 몰랐고, 주위 사람과 어울려 떠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동료 당 지도자들에게서 신뢰가 넘치는 따뜻한 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사실도 몰랐다. 그럼으로써 통합을 외치면서도 한편으론 동료에게 신랄한 조롱을 퍼부으며 자신도 모르게 불필요한 적들을 양산해내는 모순을 범하고 말았다. 공포 정치의 대가로 악명높은 스탈린조차 종종 동료와 방탕한 밤을 보내거나 옛 친구를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사정이 어려운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월급봉투를 탈탈 털어 보내기도 했다. 또한, 스탈린은 지인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농담하며 유쾌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스탈린과 비교하면 트로츠키의 사교 능력은 ‘제로’라기보다는 적을 양산해 낸다는 점에서 차라리 ‘마이너스’라고 볼 수 있다.
스탈린 역시 극히 자기중심적이었지만, 충돌이나 대립, 갈등이 생기거나 모욕을 당하면 참지 못하고 바로 폭발시키는 일이 많았던 트로츠키와는 달리 되도록 그 자리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냉철한 자제력을 발휘할 줄 아는 현실적인 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한 스탈린의 기억력은 이런 일은 절대 잊지 않고 훗날 충분히 되갚아 준 반면에 애초에 타인의 인간적인 면에 관심이 없었던 트로츠키에겐 사사로운 복수나 원한에 집착하는 것은 권력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낭비적인 일이었던 같다. 아마도 트로츠키에게 그런 것은 고상한 혁명가가 품기에는 너무나 가소롭고 형편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련에서 추방되고 외국 망명 생활에서 보여준 이방인에 대한 트로츠키의 태도는 그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순진했으며 의심이라고는 할 줄 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그는 온갖 더럽고 추잡하고 음흉한 중상모략과 음모가 난무하는 권력의 중심지에서 남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려는 한 마리의 도도한 고니처럼 꼿꼿하게 버티려 했던 외롭고 오만하며 독선적인,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눈부신 재능을 겸비한 혁명가였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트로츠키의 도도한 자태는 혁명적 이념과 혁명적 이상으로 모든 것을 깡그리 불살라 버리고 남은 잿더미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애처로운 흔적이다. 그나마 정치적 암살이 그를 이데올로기에 헌신한 순교자라는 동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바람에 광풍의 역사 속에서 곧 날아가 버릴 것 같았던 그의 애처로운 흔적은 여태껏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트로츠키,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혁명에 대한 갈망과 공포의 묘한 공존
다수파에 굴복하기보다는 투쟁하다가 몰락하는 길을 택했던, 권력의 쟁취를 최고 목표로 삼지 않았던 트로츠키는 진정한 혁명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의 인간적 결점과 오점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세상을 재앙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모든 노동하는 사람들이 세계의 예술적 • 과학적 성취를 누리는 해방의 날을 진심으로 꿈꿨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의 유언 “나의 혁명적 정직성에는 단 하나의 오점도 없다”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 역사의 무덤 속에 묻힌 오늘날 혁명가를 회상하는 일은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아무 맛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이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한 사람으로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아찔하고 멀리하기엔 너무나 유혹적인 금단의 열매다.
한편으론 비록 맛볼 수도 없고, 설령 맛을 본다고 해도 삼킬 수 없는 악마의 사탕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에 만연한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극치에 이르면 ‘이 더러운 세상 혁명으로라도 확 뒤집혔으면’ 하는 말을 무심결에 내뱉는다. 미약한 개인으로서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세상과의 일방적인 대결에서, 불만이 팽배해질수록 자신의 무기력은 더욱 또렷해지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혁명’은 일종의 푸념 아닌 푸념이다. 하지만, 곧 그런 과격한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란다. 혁명은 아름답지도 않고 낭만적이기도 않으며 평화롭지도 않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 20세기 역사를 떠올린 이성이 자신을 질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때론 찰나지만 무의식중에 혁명을 갈망하면서도 불끈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것은 잠시 자리를 떠난 이성이 재빨리 되새겨준 20세기 혁명사의 찬란한 궤적이 남긴 악몽과도 같은 혼란과 파괴를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혁명 이미지를 전해준 대표급 선수 중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혜성처럼 사라진 트로츠키가 있다. 그래서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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