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이는 사회 | 올랜도 파이지스 | 두려워서 말하지도 듣지도 못했다
Original Title: The Whisperers: Private Life in Stalin's Russia by Orlando Figes by Orlando Figes
말하기는 가장 좋은 시절에도 위험할 수 있었으나, 대숙청 시기에는 누군가가 영원히 사라지는 데 분별없는 말 몇 마디면 충분했다. (『속삭이는 사회 1권』, p418)
어머니는 딸에게 노동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너무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고, 나는 너무 두려워서 묻지 못했다.”고 마리나는 회고한다. (『속삭이는 사회 2권』, p229)
숨 막히는 사회
우선 이 책 『속삭이는 사회(The Whisperers: Private Life in Stalin's Russia by Orlando Figes)』 에 등장하는 놀랍고 충격적이며 한편으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그들의 ‘삶’이 단지 나에겐 그저 극적인 ‘이야기’일뿐이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린다. 이런 나 자신이 가증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들이 토해내듯 힘겹게 뱉어내는 ‘속삭이는 사회’를 듣고 있노라면 약간의 상상력만 발휘해도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끔찍한 삶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비록 내가 그들이 겪은 불행과 고통에 통탄해하고 비탄에 잠겨 그들이 겪은 모든 것에 대해 동정할지라도 한편으론 나 자신이 그런 불행의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나의 파렴치한 양심은 변명한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내가 그 시대, 혹은 그와 비슷한 시대에 살고 있다면 지금의 내 양심과 도덕적 가치를 끝까지 견지할 수 있을까? 동시대인의 눈에는 무모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하지만 훗날 누군가가 봤을 때는 공포정치의 압제와 부당함에 저항하고 굴복하지 않는 용감하고 꿋꿋한 나의 반항은 일찌감치 나를 총살장으로 인도하거나, 운이 좋으면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혹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든 아니면 단지 살아남으려는 방편으로 그런 것이든 내 양심과 도덕적 가치를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다면 생존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아무튼, 용감하게 시베리아로 끌려갔든 자신을 기만하며 공포정치에 순응했든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 의심, 거짓말, 배신이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 모두를 지배하는 숨 막히는 사회는 누구에게든 견디기 어려운 가혹한 삶이라는 것이다.
인민의 최우선순위는 무엇보다 ‘생존’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일제강점기를 살아갔던 조선인을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반항하지 않은 ‘조용한 삶’을 살아간 소련인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을 짓누른 공포와 정부, 그리고 이웃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의 사소한 언행 하나하나에 미칠 정도로 삶을 압박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그들의 영혼과 육신에 하느님의 가르침보다 더 깊이 새겨진 행동 교훈이었을지도 모른다.
‘인민의 적’, ‘망가진 이력’, 무엇이 이것들을 유지시켰을까?
당의 규칙과 이데올로기를 준수하는 한 사적 생활이 허용된 나치즘이나 파시즘 운동과는 달리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의 경계가 무너진 스탈린 치하의 공포정치에서는 분별없는 말 몇 마디면 그 누구라도 지금까지 영위하던 삶의 궤적에서, 그리고 그를 알던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기에 충분했다. 집단통제체제의 상징이던 비좁은 공동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을 사소한 분쟁에 노출시키는 평범한 시기심에, 코딱지만 한 방 한 칸에 한 가족 이상이 사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조금이라도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자 하는 간절함에, 혹은 선수를 치지 않으면 자신들이 고발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리고 얼마 간은 소비에트 이상에 봉사하고자 하는 시민적 의무감에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웃과 친구, 심지어 가족과 친척까지도 ‘인민의 적’으로 고발했다. 소비에트가 선전하는 ‘인민의 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선전을 믿는 사람들은 가족이 ‘인민의 적’으로 끌려가도 국가가 가족을 잡아간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믿었으며, 설령 가족의 결백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인민의 적’을 체포하다 보면 간혹 실수로 체포되는 일도 있을 것이라고 정부를 두둔하며 가족의 체포마저 합리적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소비에트 선전을 의심하는 사람이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민의 적’의 존재를 믿는 척해야 했으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를 고발해야만 했다. 반면에 소심한 사람들은 밤늦은 시간에 낯선 자동차가 집 앞에 주차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도 잡혀갈 것에 대비하며 침대 옆에 미리 짐을 싸둔 채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만 했다.
고발당한 자들은 총살당하지 않으면 거대한 ‘굴라크(gulag) 제국’의 일원으로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의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고발당한 자의 가족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인민의 적’을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굴라크 제국’의 일원이 되거나, ‘인민의 적’을 가족으로 둔 ‘망가진 이력’ 때문에 스탈린 사후 해빙의 시기에 복권이 진행될 때까지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망가진 이력’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야심을 미처 저버릴 수 없는 사람은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힌 부모를 부정하거나 ‘망가진 이력’을 숨긴 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에 헌신하는 충직한 시민으로 보이게끔 노력함으로써 생존과 함께 출세를 도모했다. 이들 중엔 볼셰비키 교육으로 세뇌당한 결과로, 혹은 국가가 선전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진심으로 믿었기에 스탈린 체제를 옹호한 사람들도 있었고, 생존을 넘어 개인적 야심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그런 척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수많은 사람이 스탈린 체제의 공포정치에 짓밟히고 억압당하고 기만당했음에도 스탈린 체제는 그가 죽기 전까지 그럴듯하게 잘 유지되었다. 무엇이 그러한 소비에트 사회를 유지하게 했을까. 봉건제도를 만들어놓고 농노들에게는 천국의 보상을 약속한 중세 교회처럼 현실의 궁핍과 고통이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에 대한 필수적인 희생이라고 설득당한 소련 사람들의 낭만적인 믿음과 이상적인 희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체제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비롯한 수동적이고 순응주의적 태도 때문이었을까. 올랜도 파이지스는 후자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스탈린 체제를 경험했던 사람 중 일부는 고르바초프 개혁 이후에도 (우리 중의 누군가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여전히 스탈린을 숭배하고 그 시절을 향수에 젖어 회상했다는 기록을 보면 전자도 전자 역시 무시할 수만은 없다.
<포로들이 겪는 영하 45도의 추위만큼이나 소련 사회는 냉각되었다 Military Museum of Finland / Public domain> |
인지부조화적인 체제가 양산한 ‘도덕의 진공’
올랜도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 체제의 공포정치가 개인과 가족생활에 끼친 영향을 깊이 탐구하는 최초의 책으로써 불신, 배신, 고발, 악의, 중상이 판을 치고 소비에트가 선전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 이상과는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현실이 보여준 모순 속에서 어떻게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한 채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답을 진지하게 파헤치는 본격적인 연구다. 그래서 한 개인의 도덕적 영역은 이 책의 주요 무대다. 체제가 제시한 소비에트 유토피아를 믿었든 안 믿었든 한 개인으로서 생존하려면 보편적 양심과 도덕적 가치는 기회주의적 타협에 맞추어 적절하게 변형될 수밖에 없었으며, 생존에만 만족하지 않고 개인적 야심을 이루고자 소비에트 시민으로 거듭나고 출세하고 싶다면 그 도덕적 변형을 기형적으로 과도하게 일그러트려야 했던 사회, 즉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가 언급한 ‘도덕의 진공 상태’가 바로 스탈린 체제가 보통 사람들에게 선물한 무겁고 냉혹한 짐이었다. 생존자들의 구술 위주로 진행된 이 연구에는 일기와 편지 등이 포함된 가족문서고 자료도 활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독자는 그들이 ‘도덕의 진공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변형시키고 억압함으로써 공포정치에 적응하고 생존에 성공했는지를 독자가 지닌 나름의 가치 판단과 경험에 비추어 고려해볼 수 있다. 이 연구가 진행되던 2000년대 초반에도 ‘인민의 적’ 생존자 가족들은 여전히 두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과거를 회상했으며, 일부는 이 연구를 계기로 다시 떠올리게 된 과거가 끌어온 두려움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문서고를 폐쇄해야 했을 정도로 그 시대가 남긴 두려움, ‘인민의 적’과 그 가족들로 대물림된 ‘정신적 외상’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이 글 서두에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
마치면서...
아무튼, 이 책은 체제를 생산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권력중심적인 입장에서 다룬 역사가 아니라 그 체제가 발산하는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서 어떻게든 구조에 적응하려고 발버둥 치는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세밀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고 흥미로운 책이다. 스탈린 체제가 제시하는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갈지자로 걷다 조용히 사라진 사람도 있고, 대놓고 체제를 비판하다 비명횡사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봉건시대의 농민들처럼 참고 견디는 수동적이고 운명에 순응하는 미덕을 견지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스탈린 치하에서도 그랬고, 같은 시기에 벌어진 파시즘과 나치즘 운동 밑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 마오쩌둥의 또 다른 공포정치 속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든 결국 살아남았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인고의 인고를 거듭하며 적응방산(adaptive radiation)한 끝에 살아남은 보통 사람들의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은 찬탄할 만하지만, 단지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에게 가혹한 시련의 삶을 제공한 체제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언가 찜찜하고 개운치 않은 떨떠름한 뒤끝을 남긴다. 물론 나라고 그러한 상황에서 용감하게 저항의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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