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자 | 가노 료이치 | 미스터리가 품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과거로부터의 속박
Original Title: 幻の女 by 香納 諒一
“그녀는 내가 자신의 과거를 알기를 바라는 걸까?” (『환상의 여자(幻の女)』, p404)
“있잖아, 스모토 씨. 그 아이는 고바야시 료코로 그냥 이대로 묻어 줘. 고바야시 가의 묘에 넣는 게 꺼려지면 새로 묘지를 수배해 주겠어? 그 아이는 과거의 인생을 버린 거야 당신은 도망쳤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도망치면 안 돼? 살아 있는 동안은 어느 쪽이든 과거를 떠안고 있잖아 …… ” (『환상의 여자(幻の女)』, p620)
가을부터 겨울에 걸친 반년도 못 되는 기간을 함께 보냈다. 어떤 날에는 돌아올 따뜻한 봄과 뜨거운 여름에 함께 나눌 소소하지만 달콤한 계획들을 속삭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봄과 여름은 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한마디 말도 없이 남자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창 열중하던 일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작스레 그만두어야 할 때의 아쉬움과 찝찝함, 허탈함과 상실감, 그리고 이 모든 감정으로부터 회오리바람처럼 몰아붙이는 뼈에 사무치는 미련은 사랑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그런 강렬한 감정이 특별한 추억을 만든다. 매듭을 확실히 짓지 못한 이별은 ‘일시 정지’ 상태로 의식 속에 착잡하게 침잠한다. 어떤 계기가 미꾸라지처럼 의식 속을 헤집게 되면 머릿속은 잊은 줄 알았던 진흙탕 같은 과거로 다시 혼탁해진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5년은 무언가를 깜빡 잊기에는 충분할지는 몰라도, 무감각해질 정도로 완전히 잊기에는 충분치 않은, 언제든지 미꾸라지 한 마리가 설쳐댄다면 과거가 현재를 혼탁하게 흐려놓을 수 있는 애매한 시간이다.
어느 날 지하철역에서 5년 만에 만난 고바야시 료코. 잠깐 차라도 한잔하면서 대화를 나누려는 옛 남자의 처량한 제의를 거절하고, 연락처만 주고받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리 속 무뚝뚝한 사람들 속으로 차분하게 사라진 그녀. 남자의 자동응답기에 한 가지 상담해 줬으면 하는 게 있다고, 그래서 내일 다시 전화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영원한 과거 속으로 영영 사라진 그녀. 어제만큼은 냉정하게 자신의 발걸음을 내디뎠던, 아직 몸속에서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던 그녀가 오늘은 시체안치소의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다. 이렇게 추억 속의 그녀가, 과거 속의 그녀가 마치 환상 속의 실루엣처럼 그에게로 다가왔다가 뜬구름처럼 사라진다. 이제 남은 일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무슨 일이 없으면 지금의 삶에 관여할 리가 없는 과거가 우연과 찰나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5년 만의 재회를 계기로 미꾸라지 같은 헤살꾼이 되어 그 남자, 변호사 스모토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는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옛사랑의 갑작스러운 죽음> |
경찰은 로쿄의 죽음을 클럽을 경영하던 마담과 조폭이 얽힌 치정에 의한 그렇고 그런 살인 사건이라고 단정 짓지만, 스모토는 료코의 어린 시절을 추적하던 중 호적상의 ‘고바야시 료코’가 자신이 아는 그녀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고,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맡은 사건과 의뢰를 모두 팽개치고 료코 사건에 매달린다는, 몇십 년 동안 눈물 한 번 흘린 적이 없다는 삐딱한 변호사 스모토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비정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흠뻑 묻어나는 하드보일드 풍의 추리 소설이 바로 가노 료이치(香納 諒一)의 『환상의 여자(幻の女)』다.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는 깊고도 깊은 미스터리가 진국이지만, 짧은 만남 속에서 평생을 간직할 수 있는 길고도 긴 여운을 맺은 스모토와 로쿄의 애틋하고 서글픈 사랑이 한껏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는, 팽이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피곤한 삶 속에서 무뎌질 대로 무뎌진 현대인의 감성을 살포시 자극하는 작품이다.
누군가를 처음으로 만나 서로 알고 지내게 되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의 과거를 모르면 할 수 없지만, 만약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 과거가 내심 그 사람에 대해 내린 앞선 판단과 완전히 어긋난다 해도 당신은 그 사람의 과거를 머릿속에서, 그리고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가. 과거는 언제든지 지나가 버리지만, 때론 『환상의 여자』처럼 유령처럼 스리슬쩍 다가와 진흙탕 속 미꾸라지처럼 현실을 흐려놓으면서 물귀신처럼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도피하기는 쉬워도 과거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환상의 여자』는 설령 그로 말미암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더라도 사람이 얼마나 과거에 집착하고 사는지, 또한, 과거로부터 얼마나 큰 속박을 받고 사는지를 미스터리 속에서 가늠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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