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성의 사내 | 필립 K. 딕 | 만약 2차 세계대전이 추축군의 승리로 끝났다면?
조가 말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처지였다면 그들이 저지른 짓을 그대로 했을 거야. 그들은 공산주의로부터 세계를 구했어. 독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빨갱이 세상에서 살았겠지. 지금보다 더 끔찍했을 거야.”
“아무렇게나 말하네. 라디오처럼, 횡설수설.”
줄리아나가 말했다. (『높은 성의 사내』, 150쪽)
「드라마 리뷰 | 높은 성의 사내(The Man in the High Castle) | 투사는 역사의 산물이다?」
사실만을 연구하는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사실만을 나열하면 사서(史書)가 되고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보태면 역사소설이 된다. 하지만, 역사를 다양하게 읽고 싶은 일반인의 처지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중요 사건에 ‘만약’과 ‘문학적 상상력’ 도입하여 파생된 새로운 역사를 상상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도 없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만인의 관심을 이끌 수 있는 질문은 ‘만약 2차 세계대전이 추축군의 승리로 끝났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전쟁사를 좋아하는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전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사석에서 농담삼아 한 번쯤은 던져봤을법한 질문이지 않은가?
<다른 현실에선 소설처럼 연합군이 패배했을 수도 있다>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유빅(Ubik)』의 작가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또 다른 작품 『높은 성의 사내(The Man in the High Castle)』는 일반적인 SF 소설과는 달리 미래가 아니라 가상의 역사를 그렸다. 그 가상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추축군의 승리로 끝난 역사다. 진지한 역사학자들은 이 작품에 일말의 가치를 두기는커녕 냉소로 일관하겠지만, 구름 따라 바람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객처럼 호기심 따라 여러 장르, 여러 작가의 작품을 오가는 필자 같은 방랑독서가들에겐 『높은 성의 사내』 같은 작품들은 별종을 맛본다는 점에서 반갑기 그지없다. 고로 『높은 성의 사내』를 펼쳐들기 전에 나름의 역사적 지식과 추론 능력을 총동원하여 추축군의 승리로 끝난 세계는 과연 어떤 세상일지 미리 상상해보고 나서 작품을 탐독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
패전국이 대체로 승전국의 문화를 흡수하듯 (승전국) 일본의 (패전국) 미국 점령지역에서는 미래의 운명을 점지해 주는 주역이 유행이다. 상류층인 일본인부터 하층계급인 백인까지 주인공들은 무슨 중요한 일, 혹은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주역으로 점을 친다. 점괘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현실처럼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듯, 점을 친 사람들은 점괘에서 나름의 설명과 해법을 구한다. 점괘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수수께끼 같은 점괘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점을 친 사람의 바람과 이해득실이 무의식중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설 『높은 성의 사내』 속에서 연합군이 승리한 세상을 그린 아벤젠의 소설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를 두고 점을 친 결과에 대한 릴리아나의 해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는 아벤젠의 책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녀에겐 연합군이 승리한 세상이 진실이고 자신들이 사는 세상은 거짓이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릴리아나처럼 일본에 점령당한 현실이 우울하면 우울할수록 믿음은 더욱더 현실도피적인 경향을 띠기 마련이다. 하지만, 릴리아나의 집념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점령국인 일본 고위관료 다고미가 사후세계라고 착각한 환상 속에서 잠시 겪는 또 다른 세상이 바로 릴리아나가 믿는 연합군이 승리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은 상반된 두 세계 중 어느 세계가 실제이고 허구인지 더는 파헤치지 않는다. 다양한 현실과 그에 따른 다양한 미래가 존재한다는 평행현실, 평행우주 이론은 이 작품에서는 밋밋하게 마무리되지만, 이후 작품인 『유빅』에서는 주요 소재로 등장하여 독자를 매료시킨다.
평행현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도(道), 선과 악, 음과 양, 해탈과 죽음, 실재와 환상 등 소설가를 꿈꾼 철학자(혹은, 철학자를 꿈꾼 소설가)답게 철학적인 요소들이 표면적으로나마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기에 터미널이나 기차역 간이 매점에서 종종 사서 읽는 가벼운 라이트소설로 생각하고 무심히 펼쳤다간 당황하고 실망할 수 있는 소설이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내』이다. 하지만, ‘만약’으로 시작된 단문의 가정에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고 상상력을 덧붙여 ‘대체 역사소설’이라는 한 장르로 완결지은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솔직히 소설 속 세상은 별로 반갑지는 않지만, 안전하게 소설로만 즐기는 것은 충분히 봐줄 만한 일이며 혹자에겐 재미있는 읽을거리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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