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9

쌀 | 증오를 태워 달리는 악행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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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 쑤퉁 | 증오를 태워 복수를 향해 내달리는 악행 열차

사람들은 모두 천장이나 담장 구멍,바닥 밑에 비밀스런 목합을 하나씩 숨기고 살아간다. 그것들 중에는 태양 아래 밝은 곳에 드러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둡고 남에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저 천장 속에 숨겨진 목합이 그랬다. 치원은 우룽의 영혼이 그 목합 안에서 광폭하게 요동치는 동시에 나지막이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쌀(米), 326쪽)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욕이나 인생의 목표는 다사다난하고 혼잡한 일상 속에서 맞닥트리는 우연과 필연이 혼재하는 수많은 인연과 기회, 마찰, 충돌 등의 일상적 사건과 경험 속에서 때때로 불꽃처럼 점화되는 감정을 계기로 얻어지기도 한다. 그중에서 부정적이지만 강력한 추진력을 동반하는 것이 바로 ‘증오심’과 ‘복수심’이다. 군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일지라도 이 두 감정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지기에는 많은 고통과 인내가 따르는 수련이 필요한 법인데, 속세에 절어 사는 범인(凡人)은 오죽하냐. 하지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뭐가 되었든 간에 극단에 이르기에는 타고난 재능과 하늘의 도움이 필요한 법, 후다닥 끓고 후다닥 식는 냄비 같은 범인의 감정으로는 증오심과 복수심이 비일비재 용솟음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매일 뿜어대는 방귀 같은 일상적 소모품일 뿐,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유일한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하기에 매일 식겁한 일이 잔치처럼 벌어지더라도 필자 같은 범인들은 그럭저럭 견뎌내는 것이다. 그렇지않고 매사에 벌어지기 마련인 크고 작은 마찰에서 기인하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을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고 늘 마음에 쌓아두고 살아간다면 세상이 얼마나 흉포할 것인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래서 사회와 인생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적절한 망각은 필수적이다.

Rice by Su Tong
<영화 '大鸿米店(Rice, 1995)'의 한 장면>

아무튼, 그 덕분에 범인의 일상사는 대부분 다행스럽게도 드라마틱하지 않다. 간혹 ‘욱’하는 성질에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대부분 시시콜콜한 사건들뿐이고 일생을 뒤흔들고 비틀 만큼 극적인 일은 아니기에 우리는 평범하지만 평온하고 무던한 삶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다. 만약 전혀 극적이지 않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소설로 쓴다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것은 없다. 그래서 소설은 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은 하나의 감정을 품더라도 좋든 나쁘든 그 감정을 범인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경지로 끌고 간다.

그렇다면 ‘증오’를 인생의 유일한 추진력으로 삼고 ‘복수’를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삶일까. 그것이 바로 쑤퉁(蘇童)의 『쌀(米)』에 등장하는 주인공 우롱의 삶이다. 전쟁과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고향을 떠나 화물칸에 숨어 타고 죄악이 꿈틀거리고 온갖 악행들이 일어나는 개 같은 도시로 온 우룽은 거의 구걸하다시피 해서 월급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쌀집 일꾼으로 취직한다. 우룽은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쌀집 일꾼에서 쌀집 사위로, 부두 조직의 말단에서 우두머리로까지 상승한다. 무일푼으로 상경한 그가 폭력과 불륜, 음모로 얼룩진 자신만의 잔혹사를 기어코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도시로 타고 온 화물차가 석탄을 태워 추진력을 얻은 것처럼 증오심과 복수심을 태워 얻은 악에 받친 모질고도 끈질긴 추진력이 그를 능수능란한 악마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범인도 발작적으로 일어난 증오와 복수심에 휩싸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어떠한가? 충동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갑작스레 폭발시킨 증오심과 복수심은 계획과 신중함을 잃은 모든 일이 그러하듯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만다. 이것은 증오심과 복수심에 순간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오심과 복수심을 다스릴 줄 알았던 『쌀(米)』의 우룽은 경솔하게 순간적인 분노에 휘둘리지 않는다. 비록 그의 언행이 잔악 무도하고 야비했을지 망정 그는 복수를 위해 증오심을 다스릴 줄 알았으며 자신의 능력에 맞는 최선의 복수 방법을 계획할 정도로 치밀했다. 그는 범인처럼 ‘증오심’과 ‘복수심’에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그 어둠의 힘을 인생의 추진력으로 역이용할 수 있었기에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으며 범인의 범주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우리의 실낱같은 바람을 비참하게 허물어트리고 모질고 간악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말의 현실을 부각시키기에 실로 충격적이다. 또한, 우룽의 역겹고 지독한 악행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끝내 쑤퉁의 소설 『쌀』을 내던질 수 없는 치명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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