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5

유빅 | 생명의 소실과 엔트로피 증가, 그리고 실존

Ubik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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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빅 | 필립 K. 딕 | 생명의 소실과 엔트로피 증가, 그리고 실존

“UN은 반생명을 금지해야 해.” 조는 말했다. “생과 사의 자연스러운 순환 과정에 간섭하는 그런 기술 따위는.” (138쪽)

“손님 같은 분은 안 오시면 좋겠군요. "스피커가 말했다. 조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나 같은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서 너 같은 놈들을 쫓아낼 거야. 자동조절식기계의 횡포가 종언을 맞고, 인간적 가치, 인정, 따스함의 시대가 되돌아오는 거지. 그러면 힘든 일을 겪은 뒤에 기운을 차리고 억지로 일하기 위해서라도 한 잔의 뜨거운 커피가 절실하게 필요한 나 같은 사람은 1포스크레드가 있든 없든 간에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될걸.” 그는 크림이 든 조그만 용기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런데 너, 이 크림인지 우유인지 모를 게 썩었다는 거 알아?” 스피커는 침묵을 지켰다. (『유빅(Ubik)』, 141~142쪽)

우주의 대법칙인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에 따라 엔트로피(entropy), 즉 무질서도는 시간에 따라 보존되지 않고 증가한다. 이 법칙은 우주뿐만 아니라 사람의 육체를 포함한 생명체에도 적용된다. 오스트리아의 양자물리학자인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생명을 아주 넓은 의미에서 즉각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 즉 연기가 대기로 흩어지는 것처럼 무질서하게 빠르게 흩어져버리는 상태로 소멸되지 않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이 말은 생명은 엔트로피가 무한정 증가하는 것을 억제하는 균형이나 질서, 혹은 그런 질서를 유발하는 흐름이나 효과이며 이것을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생리학자 루돌프 쇤하이머(Rudolph Schoenheimer)는 동적 평형(動的平衡, dynamic equilibrium)이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생명체에게 있어 무질서도의 증가는 노화와 죽음을 의미한다.

Ubik by Philip K. Dick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닌 듯한 삶이란...>

우리는 통상적으로 심장이 작동을 멈추면 죽음을 선고한다. 그렇다면 심장이 멈춘 직전과 직후의 엔트로피 값 차이는 얼마나 날까. 정말로 영혼의 무게가 던컨 맥두걸(Duncan MacDougall) 박사가 1907년 과학저널에 발표한 연구 논문대로 21g이라고 한다면 그 차이는 미미하다. 이 말은 지금 막 심장이 멈춘 사람은 비록 듣지도, 보지도, 말도 못한다 할지라도 엔트로피 수치상으로는 완전히 분해된 우주 속 먼지보다는 아직은 생명에 가깝다는 뜻이다. 죽음이 선고되었을 때, 그리고 엔트로피가 급격히 증가하기 전, 좀 더 실재적인 말로 설명하자면 부패를 겪기 전에 그 사람을 급속 냉동시킨다면, 비록 그 사람이 죽음으로 말미암은 육체적 기능의 정지로 일반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을지라도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생명의 질서, 혹은 흐름의 잔흔은 남아있지 않을까. 이른바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공상과학 소설 『유빅(Ubik)』에서 말하는 반(半)생명 상태에서 감지할 수 있는 영자(靈子) 같은 것 말이다.

『유빅』에서는 냉동으로 보존된 반생자(半生者)의 희미한 대뇌 작용, 즉 영자를 감지하는 특수한 장비를 이용해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치 전화기로 통화하듯 대화를 나눈다. 소설 『유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산 자들만이 경험하는 현실이 존재하듯, 반생자에게도 그들만의 현실을 배정한다. 반생자들은 냉동된 상태에서 산 자의 세계와 격리된 채 잠자며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세계를 그대로 복제한 듯한, 그리고 산 자들의 세계의 살벌한 약육강식의 법칙도 그대로 물려받은,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현실처럼 만만치 않은 또 다른 세상에서 투쟁적이고 위태로운 제2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산 자와 반생자의 삶에서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이고 어느 쪽에서의 죽음이 진짜 죽음인가. 그리고 그 사람의 실존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감상하는 사람의 관점이나 가치관에 따라 SF 영화는 특수 효과가 생명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겐 오래된 SF 영화는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향수를 불러오는 추억의 영화가 될 수는 있지만, 요즘 영화 같은 스펙타클한 감흥을 맛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대를 개의치 않는 탁월한 상상력과 기발함을 생명으로 탄생한 SF 문학은 다르다. 오히려 너무 시대를 앞지른 상상력 때문에 첫 발간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가 훗날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기반과 과학적 가치관이 뒷받침되는 시대를 맞이하고서야 인정받는 작품들이 있다. 바로 필립 K. 딕의 작품이 그러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유빅』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엄숙한 경계를 독창적인 상상력이 안무하는 리듬에 맞춰 냉정하게 춤추는 순발력 있는 필치로 독자의 상상력을 뒤흔드는 SF 요소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서도 개운하게 가시지 않는 미스터리 요소를 훌륭하게 접목시킨, 안 보면 두고두고 후회할 작품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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