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붕괴 | 재레드 다이아몬드 | 내가 변하고 우리가 변화고 문화가 변해야 미래가 있다
환경 훼손과 인구 과밀로 허덕이는 나라들의 문제가 세계화 덕분에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되었다. (『문명의 붕괴』, 710쪽)
환경 파괴와 환경 보호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문명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역작 『침묵의 봄(1962)』으로 농약의 위험성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문명의 발전을 이끌고 편리한 삶의 기반이 되는 석유 산업은 멀게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 만, 가깝게는 2007년 태안반도에서 일어난 기름유출 사고 등 잊을만하면 터지는 재앙에 가까운 환경 사고를 파렴치하게 저지르며 환경주의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또한, 인류는 문명을 지속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과도한 채굴과 벌채, 남획으로 지구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미래 세대가 마땅히 누려야 할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시키고 유용할 자원을 허락 없이 댕겨 쓰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는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딴죽을 걸거나 불만 • 불평을 토로하는, 최소한 겉으로나마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로 전락했을 정도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국토 중 30%를 자연보호 구역으로 지정해 개발을 제한하는 정책을 누군가 내놓는다면, 정책의 찬반 여부를 놓고 격렬한 투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 중에는 자연보호 구역 제도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30%는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연보호 구역 제도 없이도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면서 개발을 계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30%는 너무 적다고 투덜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린 환경오염의 심각성과 자연보호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도 막상 자연보호나 환경오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쉽게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세부적인 사항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로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거나, ‘공유지의 비극’에서 볼 수 있듯 개인, 기업엔 합리적이지만 타인이나 사회엔 잘못된 나쁜 행위에 대해 의도적으로, 혹은 무심결에 외면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환경 파괴와 환경 보호 사이에서 비틀거리고 있으며, 이렇게 갈팡질팡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 시각에도 세계는 지속가능하지 못한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우리는 이 길의 끝이 벼랑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짐작하면서도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눈앞의 이익을 좇아 벼랑 끝으로 자신을 내몬다. 그 벼랑은 바로 ‘문명의 붕괴’인데도 말이다 .
<이스터 섬,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
문화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희망을 걸다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문명의 붕괴(Collapse: How Societies Choose to Fail or Succeed)』에는 이스터 섬, 마야, 그린란드 등 오래전에 붕괴한 문명부터 전 지구적인 고질병의 표본 같은 르완다, 아이티 등의 현대 사회까지 환경 및 인구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붕괴한 크고 작은 문명사회들의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이처럼 붕괴한, 혹은 붕괴 직전에 있는 문명들만 등장한다면 문명의 붕괴가 꼭 필연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에 아이슬란드, 이뉴이트족, 도미니카 공화국처럼 나름의 방법으로 문제를 극복한 문명들을 제시하며 독자가 무한의 절망감에 빠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위안은 되지 않는다. 현재 상황이 ‘절체절명’으로 표현해야 할 정도로 비관적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가치관 역시 낡은 경로 의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하랄트 벨처(Harald Welzer)는 자신의 책 『기후전쟁(Climate Wars)』에서 이 모든 문제를 전쟁까지 치닫기 전에 문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문명의 붕괴』는 개인의 역량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즉, 환경오염, 기후변화, 테러, 기아 등 전 세계적인 문제들에 책임이 있는 작금의 문화와 가치관으로는 이것들을 극복할 수 없으며, 개인이 변하고 대중이 변하고 문화가 변하면서 세상이 변해야만 현재의 지속불가능한 세계에서 지속가능한 세계로 도약할 수 있다. 문화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인류와 문명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세계는 구닥다리 화석 연료를 소비하는 스포츠카를 여전히 과시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유명인은 대중의 손가락질 속에서 진지하게 사과하고, 탄소 발자국을 적게 남기는 주부가 알뜰 주부의 새로운 표상이 되어 찬탄의 대상이 되고, 제3세계의 번영과 공정한 세계를 위해 지금까지 누려왔던 문명의 혜택 중 일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된 제1세계 시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이다. 모든 행동에 걸쳐 진지하게 환경을 고려하고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걱정하는 한 개인의 선택과 가치관이 개인적 취향을 떠나 대중의 선택이 되고 문화적으로도 마땅하게 여기고 권장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기업과 정치인, 정부의 가치관도 대세에 따라 지속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며 빛을 발할 수 있을 때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문명의 붕괴』를 통해 내비치고 싶었던 신중한 낙관주의도 빛을 보고 더불어 인류의 미래도 빛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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