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 류츠신 | 외계 지적생명체, 인류의 구원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그렇습니다. 인류의 전체 역사 역시 우연입니다. 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중대한 이변이 없었으니 운이 아주 좋았지요. 하지만 행운도 결국엔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아니, 끝났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 지금 제가 교수님께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삼체』, 28쪽)
‘골든 레코드’가 가져올 수도 있는 위험
이미 인류는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 프로그램을 통해 우주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는 외계 지적생명체의 존재를 찾고 있다. 1977년 발사된 보이저 탐사선에는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의 아이디어로 인류 문명의 수백 가지 언어로 기록된 인사말과 다양한 자연의 소리 등이 녹음된 골든 레코드(Voyager Golden Record)를 실었다. 보이저 탐사선 1호는 이미 태양권덮개를 벗어나 성간 공간에 들어갔으며, 2호는 태양권덮개를 통과하는 중이다. 아직 두 탐사선은 정상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2020~2030년쯤에는 전력 부족으로 모든 작동이 멈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탐사선에 실린 골든 레코드의 수명은 무려 10억 년이라고 하니,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지 않는다면 우주라는 망망대해에 띄워진 ‘병’ 속에 담긴 인류의 메시지와 염원은 ‘영원’ 속에 버려진 어느 한 문명의 희미한 발자취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영화 스타워즈처럼 우주를 자유자재로 항해할 능력을 갖춘 외계인이 이 디스크를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인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매우 호전적인 종족이라면? 혹은 호전성은 인류 정도지만, 기후변화, 환경오염, 행성 수명 등 어떠한 이유로 절체절명의 멸종 위기를 맞아 자신들이 살던 행성을 떠나야 할 처지에 있다면, 레코드에 실린 지구와 인류의 정보는 호전적인 종족에게는 짜릿한 약탈의 기회를, 마지못해 고향 행성을 버려야 할 종족에게는 일종의 구원이나 다름없다 .
<설마 이렇게 밋밋하게 생기지는 않았겠지?> |
우주 문명의 선과 악, 정의와 도덕의 가치는 보편적일까?
인류가 진정 외계 지적생명체와의 조우를 진지하고 고려하고 있다면, 그들과의 접촉이 인류 사회와 문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사회과학적 고찰도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터지는 교수나 정치인들의 추문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서 도덕적 수준도 보통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피해야 한다. 즉, 우주 곳곳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매우 진보하고, 그래서 인류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누린다고 해서 도덕 수준도 꼭 그에 따를 필요는 없다 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인류와 비슷한 도덕적 가치를 공유하는지, 아니면 아예 도덕적 가치관이 없는지 우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인류의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 전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매우 높은 수준의 과학을 보유한 문명이라면 그들의 전쟁사 역시 매우 화려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사이먼 페그(Simon Pegg)가 주연했던 영화「앱솔루틀리 애니씽(Absolutely Anything, 2015)」에서는 선과 악의 기준이 인류와는 정반대인 외계인 무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주에서 선과 악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다면, 각각의 문명에서 ‘정의’와 ‘도덕’이 차지하는 위치와 가치도 우리와 같을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
류츠신(劉慈欣)의 『삼체(三體: The Three-Body Problem)』는 그동안 막연한 존재로만 생각되던, 혹은 인류 문명이 잉태한 갖은 고질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 뛰어난 과학 기술을 갖춘 평화적이고 선량한 구원의 존재로까지 격상되곤 했던 외계 지적생명체에 대한 환상에 경종을 울린다. 환상이 깨진 다음 정신을 차리고 나면 인류의 문제는 언제 어떤 식으로 어떤 종족과 마주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부질없는 기대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무슨 한이 있더라도 인류가 해결해야 한다는 자존심과 사명감이 남는다. 인류가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정심과 연민, 사랑 등의 감정이 풍부한 동물인 것도 사실이기에 인류는 위태위태한 위기의 순간들을 극복해 오면서 지금껏 문명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실낱같은 가능성을 극대화한 상상력
어찌 되었든 보이저호에 실린 디스크를 외계 지적생명체가 발견한다는 둥, SETI 프로그램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려 외계 지적생명체와의 접물이 실현된다는 둥, 이 모든 일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삼체』는 소설답게 실낱같은 가능성을 놓치지 않고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저자 류츠신의 말을 빌리면 역사학자가 과거를 진실하게 기록하는 것처럼, 혹은 잊힌 인류사의 한 부분을 이제 막 발굴된 고서를 통해 복원시켜놓는 것처럼 감쪽같이 눈앞의 현실로 끌어당긴다 . 그래서 행동과 생각을 제약하는 인류적인 편견과 사상을 훌쩍 내던지고 몸과 마음을 텅 비운 후 소설 『삼체』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면 상상을 초월하면서도 현실과의 한 가닥 끈을 절대 놓치지 않는 곁다리 인류사에 첫발을 들여놓는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첫발’이냐고? 무척이나 기대되는 다음 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삼체 2 암흑의 숲 | 류츠신 | 엄밀한 과학적 상상력과 풍부한 문학적 창작력이 일궈낸 놀라운 소설」
「삼체 3부 |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SF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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