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 옌롄커 | 누가 그들로 하여금 인육(人肉)을 먹게 하였나?
“가장 최고 상부가 대기근 중에는 누구도 자신의 마을이나 지역을 떠날 수 없으며 자신이 있는 곳에서 몇 명이 굶어 죽었는지 외부에 발설할 수 없다고 정했다더군요." (『사서(四书)』, 511쪽)
옌롄커(阎连科, Yan Lianke)의 『사서(四书, The Four Books)』는 어느 인터넷 서점의 소갯글과는 달리 문화대혁명이 아니라 그보다 몇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마주칠 수 있는 대약진(大跃进) 운동이 배경이다. 그중에서도 집계가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아사자를 낸 대기근 시기를 다루고 있다.
1958년 여름, 마오의 유토피아적 낙관주의에 기반을 둔 야심 찬 공산주의 실험으로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곧 참담한 실패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어떻게든 실적을 올리라는 상부의 압력에 출세를 지향하는 지방 공산당원들의 야심이 접목되자 그들은 터무니없는 목표치를 설정하고 달성한 실적은 부풀려 허위 보고하는 식으로 대처했는데, 이것은 옌롄커의 소설 『사서』에서도 잘 드러난다. 1무(亩, 약 666.67제곱미터)에 평균 200근(斤, 100kg) 정도의 밀 생산량을 보이는 현실에서 하급 간부들은 표창과 선물을 받고자 경쟁적으로 목표량을 올리는데, 1무당 1만 근을 생산할 수 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목표량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상부는 이들의 과도한 목표량을 힐책하기보다는 오히려 격려한다. 이들이 목표를 채웠건 못 채웠건 허위 목표량은 자연스럽게 허위 보고로 이어졌고 지도자들은 국가업무의 실제상황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대기근의 참상을 폭로한 또 다른 소설 홍잉(虹影, Hong Ying) 의 『굶주린 여자(飢餓的女兒, Daughter of the River)』는 대기근은 이러한 공산당 간부들의 아첨과 거짓된 보고로 유발된 인재였으며, 아무리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도 국가의 양곡창고는 항상 가득 채워져 있었고, 기아의 시절에도 간부가 굶어 죽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대기근 시기에 중국이 가뭄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잘못된 관개사업과 옌롄커의 『사서』에서도 진행되는 사철(沙鐵) 제련 운동 등 낭비적이며 실속 없는 철강 제련 사업 등으로 국토가 황폐화되면서 홍수와 가뭄에 심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간부들의 허위 보고는 식량 수급 계획에 혼돈을 불러왔다. 1962년 중국공산당 제8기 9중전회 때 류사오치가 주도한 노동분과 회의에서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70퍼센트가 인재(人災), 30퍼센트는 천재(天災)라고 결론을 내렸다.
<토법고로, 张青云 / Public domain> |
『사서(四书)』의 주인공들은 지식인들이다. 그러나 이름은 없다. 작가, 종교, 학자, 음악, 실험, 의사 등 그들이 개조 교육을 받기 전 몸담았던 직업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이름을 대신한다. 이들이 개조 교육을 받는 ‘위신구(育新區)’는 까마득한 황허 기슭, 마을도 없고 사람도 없고 소리도 없는 황량한 곳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황폐한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정신 교육도 받고 노동 교육도 받는 셈이다. 그리고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대부분이 지식인으로 구성된, 위신구 가장 끝자락에 있는, 본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변경의, 가장 황허에 인접한 99번째 구역, 즉 99구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쓸쓸한 오지에서 생활하지만, 위신구의 생활은 대기근이 오기 전까지는 확실히 감옥보다는 나은 삶이었다.
그들이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재주껏 탈출하던가, 아니면 도망자 세 명을 잡는 공을 세우던가, ‘실험’이라 불리는 지식인처럼 획기적인 발상으로 상부를 기쁘게 하던가, 그도 아니면 성실 근면한 모범적인 생활의 보상으로 오각별(五角星)을 차곡차곡 모아 집으로 가는 것이다. 이 중 가장 무난한 방법은 오각별 모으는 것이기 때문에 저마다 인륜, 양심, 지식인으로서의 위엄이나 명예 등 모든 문명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이(99구를 관리하는 관리)에게 잘 보이려고 피눈물 겨운 분투를 벌인다.
그러나 오각별이 준 희미한 희망도 대기근이 찾아오면서 절망으로 역전된다. 줄고 줄어 하루 한 냥(대략 38g)이던 상부의 고구마 배급도 결국 끊기고 만다. 죽음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 굶주림이라고 했다. 부모는 자식의 목숨을 살리고자 기꺼이 희생하지만, 자신이 굶주리면 자식이고 뭐가 없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시뻘건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식을 잡아먹는다. 그것이 인간이 짊어진 생존 본능이고 세상 막다른 곳의 이치다. 아무리 세상 이치에 달관한 지식인들이라도 절체절명에 처하면 그들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어느 지식인이 대들보에 목매달 마지막 힘을 얻고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료의 살점을 먹은 다음 얼마나 살지 모르는 동료를 위해 자신들의 살점과 어렵게 모은 오각별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는 장면은 눈물겹다 못해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태양은 대지를 감싸고 대지는 살고자 하는 모든 생명을 떠받든다. 죽음보다 고요한 정적이 지배하는 그곳은 바람에 먼지가 춤을 추고 구름이 흩어지는 미세한 공기의 울림도 사람의 귀로 스며든다. 무덤보다 더욱 쓸쓸한 그곳은 분명히 자연이 내려준 가혹한 무대이다. 가혹한 무대에서 거친 자연과 사투를 벌이는 그들의 가련한 몸부림은, 자세한 내막이야 어찌 되었건 인간의 역사적 발전 과정이 자연과 인류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는 점에서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러한 노력에도 그들은 죽음보다 두려운 굶주림으로 내몰렸다. 굶주림은 문명 시절에는 몸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한가롭게 삶을 관망하고 있던 생존 본능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곤두세웠고,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수치심, 체면 따위는 뜨겁게 달궈진 철판 위에 흩뿌려진 물방울처럼 순식간에 증발시켜버렸다. 한때 남들보다 책도 많이 읽고 많이 배우고, 그래서 지식인이라 칭송받던 이들이 징그러운 바퀴벌레가 되어 황폐한 대지를 기어다녔다. 누가 이들을 이 지경까지 내몰았을까.
광기, 정신병, 유별난 취미 따위로 인육을 먹는 행위는 역겹지만 참혹하지는 않다. 그러나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최후의 발악과 같은 상황으로 치달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 인육을 먹은 사람들을 탓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다른 사람들을 탓해야 하는가? 옌롄커의 『사서』는 중국에선 금서가 되었다. 중국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인재로서의 대기근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담은 작품의 출판은 거부한다. 이것이 바로 옌롄커가 지적한 대로 중국 현실의 한 단면이며 이해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중국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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