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30

영자의 전성시대 | 불꽃처럼 일어났다 한 줌의 재로

영자의 전성시대 | 조선작 | 불꽃처럼 일어났다 한 줌의 재로 사라진 영자

1973년 발표한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소설보다는 원작의 선정적인 소재를 자극적으로 활용한 동명의 영화가 더 인기를 끈 작품이며 지금도 ‘영자의 전성시대’하면 원작보다는 영화(김호선 감독 「영자의 전성시대(1975)」 리뷰 보기)가 먼저 떠오른다. 영화나 소설 둘 다 아직 못 본 필자 역시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제목에 먼저 떠오른 것은 부끄럽게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 걸맞은 선정적인 장면이었다. 실제로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는 선정적이라고 부를 정도로 수위가 높은 작품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딱지가 붙었을까. 용접공 영식과 창녀 영자로 대변되는 하층민의 사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점이 가식적인 대중에게는 선정적으로 보였을까. 그러나 그것은 선정적이라기보다는 노골적이며 소리없는 절규에 가깝다. 그것보다는 위선과 가식이라는 두툼한 가면을 쓴 배부르고 등 따스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향한 무언의 항의처럼 보이는 하층민의 몸부림과 절규가 불쾌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작품 일부분만을 끄집어 내 과대 포장한 다음 선정적이고 외설적인 작품이라는 경고 문구를 달아 사회에서 매장해 버린 것이다.

poster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꿈은 참으로 소박하다. 무교동의 한 화려한 술집에서 보타이를 매고 일하는 것이라든지 명동의 한 소문난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해보는 것이 어렸을 적 꿈이었던 영수, 배불리 먹는 것을 꿈으로 안고 서울로 무작정 올라온 영자. 불행한 그들의 어린 시절은 그들에게 배움의 기회조차 주지 못했기에 꿈도 소박할 수밖에 없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으며 하고 싶은 것도 많아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는 조그만 사글세 방도 감지덕지하다.

그렇다면 ‘배불리’ 먹기 위한 영자의 투쟁은 성공했는가. 조선작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의 제목은 한때나마 영자가 몸을 파는 창녀로서 잘 나갔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수가 철공장에 있을 때 주인집의 식모였던 영자는 영수가 월남에서 돌아와 보니 청량리 역전에서 몸을 팔고 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로 외팔이가 된 영자는 손님 받기도 어려웠다. 매일 허탕만 치는 영자를 보다 못한 영수가 의자 다리 조각으로 영자에게 의수를 만들어 주고부터 ‘영자의 전성시대’는 시작된다.

그러나 제목 『영자의 전성시대』에는 또 다른 뜻도 숨어 있었다. 바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같은 역설적 의미이다. 영자는 사글세 방을 얻어 영수와 살아보겠다는 조촐한 꿈조차 이루지 못한다. 가진 자들은 지나친 탐욕 때문에 망하고, 영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런 가진 자들의 탐욕을 위해 망한다. 순진한 영자는 벌어들인 돈을 고스란히 포주에게 맡기지만 정부의 일제 단속으로 포주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돈을 찾으려고 무리하다 그만 불의의 사고로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영세자영업자 밑에서 말도 못할 열악한 생활을 했던 어린 직공들의 희망 없는 삶과 다를 바 없다. 짓궂은 아이들의 새총을 피해 달아나는 참새처럼 끊임없이 고동치는 그들의 소박한 꿈이 담긴 가냘픈 심장은 기적처럼 모든 시련을 참고 참으며 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이나마 뭔가 이룰 순간이 오면 세상은 그들의 꿈을 여지없이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그들의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많은 영수, 영자가 있었던 것 때문인가. 아니면 무정한 사회는 그들의 소박한 꿈조차 못마땅했을까.

당시 독재 산업자본주의 국가적 가훈은 ‘하면 된다’였고, 많은 영자와 영수는 이 말만 곧이듣고 실천에 옮겼지만, 어느 교수의 말마따나 세상에는 해서는 안 될 일도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해서는 안 될 일을 강행하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을 밀어붙이니 부작용과 부조리는 사이좋게 쌍쌍 파티를 열 수밖에 없다. 모든 국민이 이렇게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오로지 돈과 출세를 향해 내달리니, 한정된 돈과 출세의 자리를 두고 끊임없는 충돌과 치졸한 아귀다툼은 반복되고 그 결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생존투쟁에서 수많은 영수, 영자는 탈락할 수밖에 없다. 성실과 정직만이 유일한 무기였던 직공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대책 없이 도시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무책임한 정부 앞에서 쓴 고배를 마시고 좌절하지 않고 배길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영자의 전성시대(Yeong-Ja's Heydays, 1975) scene 03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독재적 산업화 개발 논리에 매몰차게 파묻혀 소외된 하층민의 삶, 그리고 그들의 고통과 억눌린 욕망을 때밀이 영수와 창녀 영자의 일상을 통해 표출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두 사람의 직업 다 사람의 ‘묶은 때’를 벗겨주는 직업이다. 영수는 육체의 겉 때를 벗겨주고 영자는 육체 속의 묶은 욕정을 벗겨준다. 이것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반복되는 삶의 굴레이다. 결국, 몸을 파는 창녀든 목욕탕의 때밀이든, 배웠든 못 배웠든 그들은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사회에 이바지하는 어엿한 구성원이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듯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철저하게 계산적인 인간 사회에서 이러한 주장은 패배자의 구차한 발명일뿐이다.

"이걸 달고라면 골목길에 나가 설 수가 있겠어. 누구라도 암, 어떤 싹수없는 자식도 꼼짝없이 속아 넘어가고 말 거야." 영자는 의기양양해서 이렇게 말했다. 영자는 나무팔뚝이 든 소맷자락이 대롱거리는 원피스를 한 팔로 치켜들고 바라보며 또 한 번 깔깔거리고 웃었다. 기뻐하는 영자의 모습을 보자 덩달아 나도 기뻤다. 나는 기쁨과 열적은 표정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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