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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30.

[책 리뷰] 순수한 지성을 통한 자기 성찰과 자기 인식 ~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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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지성을 통한 자기 성찰과 자기 인식

원제: 전환시대의 논리 by 리영희
‘객관적인 자기위치의 인식’ 없이 한 정부나 지도자나 국민이 내일의 생존을 기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국제사회에서의 ‘객관적인 자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국민에게 ‘주체적인 자기’가 있을 리 없다. (『전환시대의 논리, 246쪽)

故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70, 80년대 한국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상의 은사’이자 권력으로부터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갖은 핍박을 당하며 모진 인생을 살아온 우리 시대를 대표했던 한 지식인의 논문집이다.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지 이미 4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논문의 주제들은 빛바랜 세월 속에 퇴색해버린 역사의 한 조각으로 굳어버렸을지 모르지만, 문장과 행간에 담긴 저자의 예리하고 객관적인 지적 편력과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는 놀라운 식견은 지금에 와서도 이 책 『전환시대의 논리』가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논문집에는 권력에 눌려, 혹은 아첨하느냐 반공(反共) 이외의 가치나 진실에 대해서 침묵하는 언론과 지식인에 대한 비판, 대중매체로 자리 잡기 시작한 텔레비전이 가져올 국민의 ‘백치화’에 대한 우려(TV 시청은 치매 발병 위험을 높인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반적인 안보 관계의 현황과 전망,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재등장한 일본의 배경과 현실, 한 • 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 베트남 전쟁의 숨겨진 진실 등 60년대 ‘전환시대’를 거쳐 ‘화해’의 시대 70년대로 막 진입한 시기의 한반도와 이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통찰하는 폭넓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베트남 전쟁 관련 논문 두 편은 필자처럼 아직도 베트남 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모르는 독자에겐 정말 긴요한 논문이다. 베트남 전쟁을 기술한 두툼한 책들과 비교하기에는 턱도 없는 짧은 분량이지만 양보다 질이라는 말이 있듯이 핵심적인 부분만을 추스르고 객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돕는 데 손색이 없다.

책에 실린 여러 논문 중에서 백미를 꼽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바로 중공(현재의 중국) 근현대사를 다룬 부분을 선택하겠다. 당시 반공환자와 극우환자로 득실대던 한국에서 반공의 껍질을 벗겨 내고 중공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매우 드물었으며, 특히 ‘인류 사상 초유의 일대 실험’이라고 칭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에 대한 논문은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가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을 집필했던 상황처럼 제한된 자료로 원격 연구를 했음에도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상당히 예리하다. 당시 외부 세계에는 상부층의 권력투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내란에 버금가는 혼탁하고 무질서한 상황으로 비추었던 문화대혁명의 본질에 대해 저자는 정신주의를 앞세운 ‘인간-사상 개조운동’으로 정의한다. 이는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시킨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1981년)를 토대로 저술한 『문화대혁명사(文化大革命間史)』(진춘밍 외 지음, 이정남 외 옮김, 나무와숲)에서 문화대혁명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좌경적인 착오 중 한 부분인 마오쩌둥의 공상주의적 이상 사회 건설에서 말하는 공산주의 신인간과 비교해보면, 저자 리영희 선생의 통찰력이 얼마나 앞서간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훗날 자서전 『대화』에서도 밝혔듯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리영희 선생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문화대혁명을 본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이상에 대한 염원에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의 한 수단이 발휘되는 거대한 실험으로 문화대혁명을, 그리고 그 실험 무대로써 중국을 바라본 것 같다.

영희 선생은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며, 지식인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라고 말한다. 거대한 권력과 야만적인 무지의 폭력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영웅적인 지식인도,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부조리조차 고발할 수 있는 소박한 지식인도 구경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현대의 지식인은 전부 죽었다고.

실천은 믿음에서 나오며 이 믿음은 가치관과 신념에서 나오고 이 신념은 객관적인 자기 인식과 자기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전환시대의 논리』는 자기 성찰과 자기 인식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의식화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고품질의 영양제이다. 객관적인 논리와 예리한 통찰력, 그리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한 순수한 지성을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정독함으로써 함양할 수 있다면, 독자는 우리 사회의 실태와 그 위를 부유하는 사실과 거짓 속에서 진실을 꼭 집어낼 수 있는 독수리 같은 매서운 안목을 키우기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더불어 사회를 오염시키고 부패시키는 부조리를 쪼아대며 비판할 수 있는 가상한 용기도 발휘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도 그리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 리뷰는 2016년 08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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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24.

[책 리뷰] 일상에 담긴 분자생물학적 고찰 ~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후쿠오카 신이치)

I do not know the world even if I divid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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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담긴 분자생물학적 고찰

원제: 世界は分けてもわからない by 福岡 伸一
세상은 나누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눴다고 해서 정말로 아는 것도 아니다.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146쪽)

과서처럼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들이 실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풍부한 예를 들어 확실히 이해시켜주는, 수필처럼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일상에 대한 분자생물학적 풀이, 그래서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바로 후쿠오카 신이치(福岡 伸一)의 책들이다. 그의 책은 얄팍한 만큼 깊이는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이해하기도 쉽다. 좀 더 두꺼운 책을 밟기 위한 첫걸음으로 삼기에 아주 알맞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하는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世界は分けてもわからない)』은 제임스 듀이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이후 무섭게 성장한 분자생물학의 마이크로적이고 기계론적인 관점만으로는 생명 현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찰하는 책이다. 참고로 후쿠오카 신이치의 또 다른 책으로 「생명은 ‘흐름’이다 ~ 생물과 무생물 사이(후쿠오카 신이치)」를 소개한 적이 있다.

명현상에 부분이라 부를만한 것은 없다. 생명체를 장기에서 조직으로, 그리고 세포로 쪼갠 것도 모자라 단백질, 지질, 당질, 핵산과 같은 부분으로 쪼갠다. 이 가운데 단백질은 화학조미료 같은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물질인 아미노산으로 분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자신을 복제하고 분해하는 원시적인 생명체들만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생각도, 의지도 없고 감정도 논리도 없다. 그런데 이런 마이크로 차원의 물질들이 유기적으로 조합되어 질서와 조화를 갖춘 어떤 평상 상태에 도달하면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이것들은 대사하고 생식하며 자손을 만들어낸다. 일부는 감정과 의식, 사고 능력을 갖춘 지능도 보유한다.

그렇다면, 마이크로 차원의 부품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거기에 더해지는 플러스 α란 대체 무엇일까?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활력소, 그것은 바로 ‘생기’다. 그리고 생기는 곧 ‘흐름’이다. 바로 이 에너지와 정보의 흐름, 생명현상의 본질은 물질적인 기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주고받는 에너지와 정보가 유발하는 흐름과 그 효과에 있는 것이다. 수정란으로부터 출발한 세포는 분자의 교환, 에너지의 교환, 그리고 정보의 교환 등의 연속적이고 끊임없는 변화를 겪는다. 생명에서 고정되고 확정된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생명은 물질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유발하는 동적인 평형과 그 효과이다.

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을 고찰하는 여정에서 저자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독자가 한눈을 팔지 않도록 일상의 분자생물학적인 흥미로운 예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암세포와 종이 한 장의 차이인 ES세포(배아줄기세포), 편의점 샌드위치를 통해 본 음식의 부패 메커니즘과 방부제의 특성, 해상력은 중앙부가 높고 빛의 감수성은 주변부가 더 높은 망막의 특징에서 착안한 ‘시선’의 수수께끼, 가장 작은 섬인 ‘랑게르한스섬’과 당뇨, 과학자들의 지나친 경쟁과 의욕이 가져온 연구 자료 날조 등 저자가 독자를 이끌어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조심스레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작은 이야기들도 매우 흥미롭다.

헨젤이 길을 잃지 않으려고 빵 조각을 숲 속 길에 떨어뜨린 것처럼 저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곳곳에 재밌는 미끼를 심어 놓았고 독자는 이것들을 덥석덥석 물어가면서 어느새 종착지, 즉 책의 마지막 장에 도착해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그리고 동시에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책에서 뭔가 부족한 점을 발견해서는 아니다. 다만, 간만에 지적인 짜릿한 자극을 받아 인류의 유구한 본능인 호기심을 발동시킨 뇌가 뭔가 더 읽고 싶고, 뭔가 더 알고 싶다는 지식에 대한 탐욕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필자가 누누이 강조하는, ‘좋은 책’은 독서 릴레이를 지속시켜 주는 책이다. 생명의 본질이 연속성에 있듯, 어쩌면 진정한 독서의 힘도 띄엄띄엄 한두 권 읽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매일 지속하는 꾸준함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래야 안중근 의사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을 것’이라는 가르침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리뷰는 2016년 08월 2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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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18.

[책 리뷰] 그들을 짜내 얻은 장밋빛 기름 위에 익살의 배를 띄워라 ~ 열외인종 잔혹사(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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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짜내 얻은 장밋빛 기름 위에 익살의 배를 띄워라

원제: 열외인종 잔혹사 by 주원규
인간다운 식사라니……. 김중혁은 광록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과연 우리가 인간인가. (『열외인종 잔혹사』, 75쪽)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이렇게 어려줄 줄이야

신들린 숟가락질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이에 질세라 위액과 침샘은 쇠라도 녹이려는 듯 염치없이 분비되고, 칙칙폭폭 죽이 잘 맞는 윗니 아랫니는 냉혹하게 모든 것을 으깨버린다. 이것들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죽이 착착 맞는다. 그 목적이란 바로 ‘식사’다.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닌 음식들을 먹을 땐 죽이 잘 맞든, 맞지 않든 상관없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별미를 맛볼 땐 상황이 다르다. 별미를 맛본다는 행복감에 비례하여 별미가 조금씩 사라진다는 불행감이 밀려온다. 하릴없는 식탐으로 조금씩 조금씩 별미가 줄어드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썩은 짬뽕 냄새를 풀풀 풍기는 깊고도 깊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어 본 적이 있는가? 가능하다면 별미를 유통 기한이 지날 때까지, 혹은 쉰내가 나기 직전까지 보관하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와중에 조금씩 그 맛을 음미하며 어떻게든 최대한 아끼고 싶은, 궁상맞으면서도 숭고한 자린고비 정신에 도취되고 싶을 정도의 별미를 만난 적이 있는가?

필자는 무슨 귀신에 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망스럽게도 주원규의 『열외인종 잔혹사』를 읽은 내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아껴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궁리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끝을 보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으니, 바로 무협 소설의 대가 김용 선생의 작품을 읽는 것 같은 폭발적인 몰입감이 결국 필자의 의심스러운 자린고비 정신을 묵사발로 만들어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안중근 선생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일의 읽을거리를 위해 자린고비 정신을 발휘해야 했건만 끝내 필자의 박약한 의지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익살의 관에 안치된 충격적 결말

연 『열외인종 잔혹사』의 무엇이 필자를 책에 빠진 좀비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시종일관 유지되는 품격 높은 익살 때문이다. 어떤 작가는 퍼즐 조각 맞추듯 ‘가나다라마바사’를 조합하여 통렬하게 사회를 비판함으로써 대중의 울분을 풀어주기도 하고, 또 다른 작가는 감성적인 이야기를 지어내어 말라비틀어진 대중의 마음을 살짝 마사지해 주는가 하면, 또 다른 작가는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황폐한 도시가 짓누르는 위압감에 보쌈처럼 푹 삶아진 대중의 피로를 풀어준다. 그렇듯 주원규의 소설 『열외인종 잔혹사』는 홍수처럼 범람하면서도 결코 지나치거나 황망하지 않은 여유로운 익살로 삶에 찌든 나머지 웃음마저 잃은 독자의 돌덩이 같은 딱딱한 마음을 위로해 준다.

하지만, 이 위로는 그냥 웃고 넘어가기에는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각별한 범상치 않은 요소다. 익살꾼들이 흥겹게 판을 벌이는 듯한 텍스트를 정신없이 빨아들이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유쾌함은 작품의 혹독한 결말이 일으키는 충격을 조금이나마 완화해주는, 일종의 예방주사 같은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명품 • 쇼핑 중독자이자 정규직에 목 매달은 윤마리아, 하수구 속의 쥐새끼보다 못한 존재로 사회적 낙인이 찍힌 노숙자 김중혁, 빡통 신봉자이자 극보수주의자인 월남 참전자 장영달, 대책 없는 양아치 청소년이자 게임 중독자인 기무 등 네 명의 ‘열외인종’은 경제성장의 자랑스러운 상징이자 자본주의의 신성한 이념인 코엑스몰 지하에서 일어난 또 다른 ‘열외인종’의 혁명적 테러에 휩쓸려 갖은 고초를 당할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수십 명의 민간인이 처참하게 사살되는 광경도 목격한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최소 일주일 이상 우려먹을 수 있는 이 엄청난 뉴스거리는 표백제를 진탕 처바른 것처럼 세상 속에서 깔끔하게 지워진다. 영악한 세상은 방귀 뀌듯 빈번하게 일어나는 고위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숙달된 솜씨로 가뿐하게 덮어버리듯 ‘열외인종’의 이유 있는 분노와 정당한 울분을 영민하게 몽유병 환자들의 판타지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다음 잽싸게 덮어버린다.

‘열외인종’을 짜내 얻은 장밋빛 기름 위에 익살의 배를 띄워라

민자본주의는 압착기로 기름 짜듯 ‘열외인종’을 짜내서 얻은 장밋빛 기름을 윤활유 삼아 쌩쌩하게 돌아가지만, ‘열외인종’의 희생은 뱃심 두둑한 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주고받는 사과 상자 안의 내용물이 결코 사과로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능변가처럼 쏟아내는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문장 속에 이런 절망스럽고 충격적인 비전이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리며 숨을 쉬고 있었으니, 『열외인종 잔혹사』는 보기보단 그악스러운 면이 있는 작품이다. 한마디로 병 주고 약 주는 격이 아닌가. 물론 이 경우에는 약이 먼저 주입되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열외인종’을 짜내 얻은 장밋빛 기름 위에 불씨를 놓아 좌절과 절망을 폭발시키기보다는 익살의 배를 띄워 그들이 흘린 짭조름한 피와 눈물과 땀 방울 위로 쓸쓸하면서도 무심하지 않은 위로의 손길을 보내는, 그들의 고충을 눈물겨운 웃음 속에 허탈하게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우수 어린 작품이다.

이 리뷰는 2016년 8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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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12.

[책 리뷰] 혁명적 이상을 품은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고백 ~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천이난)

Youthless A Ten Year Cultural Revolution for Rebel Workers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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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이상을 품은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고백

원제: 青春無痕:一個造反派工人的十年文革 by 陳益南
신념과 정신적 가치가 없어진 국가와 민족 • 사회는 풍부한 물자를 지녔다 할지라도 그 사회에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644쪽)

무려 10년이나 지속한 연극, 그것은 또 하나의 유인책이었을까?

문화대혁명은 장장 10년간 벌어진 ‘연극’이다. 이 연극에서 사회 기층 배우들의 변동이 기본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정세와 분위기에서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승리자 혹은 실패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119쪽)

10년이나 지속한 연극, 이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배우들에게 패배의 쓴 고배와 승리의 달콤한 축배를 모두 안겨 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봄처녀 변덕만큼이나 지긋지긋한 변덕의 연속이었다. 결코, 조연조차 될 수 없었던 순진한 인민들은 마오쩌둥(毛澤東)과 당 중앙의 지시대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의 실권파와 지도간부, 그리고 관료주의에 조반했다. 1949년 해방 후 17년 동안 황제와 같은 위엄으로 인민의 머리끝에서 신처럼 군림해 왔던 당 간부들의 부정부패와 부당한 대우, 경직된 관료주의로 산처럼 쌓였던 인민들의 원한과 분노는 불붙은 화약고처럼 순식간에 폭발했다. 인민들의 뜨거운 호응 아래 젊은 청년들 위주로 조직된 조반파(造反派)들은 잠시나마 주연으로 올라서며 순조롭게 권력을 장악해 갔다. 당 간부와 관료들은 별다른 대꾸도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나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절대 거역할 수 없는 중앙의 지시였고 이것이 대세였다. 10년이 지났다. 자격을 갖지 못한 자가 대세에 떠밀려 주연 자리를 꿰찬 대가는 가혹했다. 조반파는 철저하게 몰락했으며 한때 우렁찬 ‘타도’의 구호 속에 쓰러졌던 관료들은 원래의 지위로 돌아왔다.

문화대혁명은 아래에서 곧게 위로 내뻗은 일반적인 혁명과는 달리 위에서 아래로, 그것도 중간은 훌쩍 건너 띄고 진행되었으며,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조반파는 꼭두각시처럼 중앙의 지시를 거역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변덕스러운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정책을 고려해본다면 조반파의 몰락은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의 유인정책인 ‘뱀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는’ 방법의 하나로 쌓이고 쌓인 인민의 원한과 분노를 잠시 마음껏 폭발시켜 풀어줌과 동시에 훗날 문제가 될 수 있는 극좌분자를 미리 색출하기 위한 고도의 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또는, 공안 특유의 기만정책인 ‘솔직하게 고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엄벌에 처한다.’의 전국 버전인지도 모른다. 정직하게 중앙의 지시에 따라 마오쩌둥과 중앙을 제외한 기존 권위에 혁명적으로 반대한 조반파는 결국 철저하게 몰락했으니 말이다.

몰락한 자의 이야기, 그것은 채워지지 않은 역사의 빈자리

국의 문화대혁명을 말하면 희희낙락 웃으며 고문과 살인, 약탈을 즐기는 홍위병들이 떠오른다. 자신의 할아버지뻘 되는 노간부나 노장군에게 고깔모자를 씌우고 조리돌리는 것은 약과이며, 시안의 ‘홍색 공포대’ 홍위병은 한 교사에게 휘발유를 부어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으며, 베이징의 ‘붉은 행동위원회’ 홍위병은 부르주아로 지목된 베이징대학 병원의 외과 의사의 배를 수술용 메스로 가른 다음 간장과 고춧가루 물을 부어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 죽게 만들었다. 농촌 등지에서는 지주, 부농분자로 몰린 가족과 그 친족들을 살육하는 참극도 발생했다. 또한, 조반파의 파벌 싸움과 내분으로 발생한 무투(武鬪)는 탱크까지 동원되는 웃지 못할 현대전으로 치닫기도 했다. 1980년 12월 20일 『베이징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1966년 8〜9월간 베이징에서 맞아 죽은 무고자만 1,772명에 달한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일찍이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은 없었다. 혁명의 불을 지피고 하늘 높이 혁명의 뜨거운 깃발을 휘날리려면 응당 누군가는 휘발유처럼 발화성이 강한 피를 흘려야 한다. 그것이 소수가 되었든 다수가 되었든 그것이 혁명의 비극이고 본질이며 힘이다. 비록 문화대혁명이 위에서 아래로, 일반적인 혁명의 궤도에서는 조금은 벗어났지만 그래도 이에 호응한 학생과 노동자, 인민들은 유감없이 혁명의 기질을 발휘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어 온 사회주의 이상과 기존의 부당한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가차없이 온몸을 던졌고 그것은 무투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많은 젊은이의 피로 증명되는 듯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역사는 문화대혁명을 외면했고, 조반파는 철저히 몰락했다. 역사에 실패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듯, 몰락한 자의 이야기는 들어주는 이가 없다. 하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몸소 조반파의 극심한 부침을 진저리나도록 경험한 천이난(陳益南)의 회고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문혁 10년(青春無痕:一個造反派工人的十年文革)』를 들어보면, 몰락한 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압박하고, 그러면서 채워지지 않은 역사의 빈자리를 어떻게 되돌아보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혼란, 변화무쌍했던 문화대혁명의 한 역사적 단면

유저술가 천이난(陳益南)은 문화대혁명 초기 조반파에 가담했을 때만 해도 일개 수습공이었나 혁명의 기류를 타고 단번에 3천 명이라는 회사 전체 직원과 간부들이 주목하는 인물로 급부상했다. 그가 한번 외치면 수많은 사람이 호응하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덕분에 높은 간부들이나 수장들만이 탈 수 있는 일등 침대칸도 타게 된다. ‘청년근위군’이라는 전문 무투 조직에 참여했을 때는 총기번호 041949의 보병총으로 무장한 의젓한 혁명군이 되기도 했다. 다른 순수한 조반파 동지들처럼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향해 혁명에 뛰어든 천이난은 문화대혁명 기간 내내 혁명의 지조와 절개를 굳게 지켰고 그 결과 다른 적극 분자들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혈기왕성했던 그에게 문화대혁명은 혹독한 정치적 시련이자 값비싼 인생 수업이었으며, 마오쩌둥 사상과 공산당 지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바탕으로 의식화를 고취할 수 있었던 성숙의 시간이었다.

천이난이 남긴 이 한편의 조반파 노동자의 장대한 서사시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변화무쌍했던 문화대혁명의 한 역사적 단면을 보여준다. 혼란을 틈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혁명에 참가하는 척했던 일부 협잡꾼들이나 무뢰배들, 순수한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혁명에 참가한 젊은이들, 권력의 맛에 흠뻑 취해 폭력을 행사한 홍위병 등 이 모두가 문화대혁명의 일부이기에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어느 한 단면으로 문화대혁명 전체를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다. 부분으로 전체를 유추해볼 수는 있지만, 부분으로 전체를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이자 조반파의 핵심 우두머리로서 10년이라는 절대 짧지 않은 문화대혁명의 대장정을 체험한 천이난의 회고는 문화대혁명이 인민에게 실제로 어떻게 다가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등 실제적이고 국지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특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권력이 휘두른 역사적 회오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한 개인으로서 체득한 그의 소중한 경험이 진득하게 녹아 있는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은 문화대혁명의 참된 역사를 완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조각이다.

마치면서...

화대혁명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문화대혁명은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다. 뭐라고 쉽게 단정 지으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문화대혁명의 험난한 역경을 겪은 인민에 대한 모욕이자 편협한 지식의 한계를 들어내는 오만일 수도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의 성공만을 중시하는 틀에 박힌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머리로 천이난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을 해석하려 든다면 그것은 무모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혁명 유토피아 건설을 향한 영웅적인 희생정신으로 조반파에 가담한 많은 청년의 진심을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적 유물로 오해하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가슴으로 이 책을 읽고 느끼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혁명의 폭풍 한복판에 과감하게 뛰어든 열혈 청년의 파란만장했던 문화대혁명 체험을 담은 이 회고록은 진정한 호소이자 쓸쓸한 감동이며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운명의 쓰디쓴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2016년 8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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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9.

저사양 벤치마크(PCMark 7) - Windows 10 Enterprise RS1 vs 2016 LTSB vs Server 2016

사용된 이미지
- ko_windows_10_enterprise_version_1607_updated_jul_2016_x64_dvd_9059834.iso
- WIN_ENTERPRISE_S_10_VER.1607_BUILD.14393.10_OEM_64BIT_38MULTI.ISO
- 14393.0.160715-1616.RS1_RELEASE_SERVER_OEMRET_X64FRE_EN-US.ISO

사용된 노트북
- Asus K55DR(8G, x110 SSD)

 윈도우 10 레드스톤1(RS1)이 공개되었고, 얼마 전에는 비공식적인 루트로 Windows 레드스톤1(RS1)의 LTSB 버전과 Windows Server 2016 RTM 버전이 유출되었다. 그래서 위의 세 이미지 파일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PCMark 7로 벤치마크를 해보았다.

설치는 25G 고정 VHD에, 윈도우 설정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초기 기본 값에 시작 효과(최적 성능)와 페이지 파일(없음)만 건드렸다. 드라이버도 윈도우 업데이트를 이용. 다만, 윈도우 서버 2016은 드라이버 업데이트가 안 되기에 AMD-Catalyst-15.11.1 Beta를 설치했고, 윈도우 10과 비슷한 설정을 구성하고자 서버 관리자를 통해 무선랜 기능만 추가했다.

 흔히 말하는 '윈도우가 얼마나 가볍나, 무겁냐'를 측정하는 Lightweight score는 윈도우 서버 2016이 두각을 나타내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앞의 두 윈도우 10보다 나은 성능을 보여주었다. 바탕화면 진입 후 초기 메모리 점유율도 서버 2016이 가장 낮았다. 위 벤치마크 결과만을 놓고 보면 LTSB는 생각만큼 가볍지 않다.

그렇다고 섣불리 포맷하고 윈도우 서버 2016으로 갈아타야 할 이유는 없다. 만약 사람이 '가볍냐, 무겁냐'를 느끼는 체감 속도에 한계가 있다면, 이런 체감 속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고사양 컴퓨터에서 이런 점수 차이는 무의미할 수도 있고, 윈도우 10은 아무래도 최근 하드웨어에 더 최적화된 OS이기에 다른 시스템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윈도우 서버 2016 RTM은 엣지와 앱, 블루투스, IE의 플래쉬도 없다. 하지만, TP4까지는 여전히 엣지, 앱, 블루투스, IE 플래쉬 존재했었다. 아무튼, 내가 사용하는 저사양 노트북에서는 윈도우 10과 윈도우 서버 2016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이 리뷰는 2016년 8월 9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 추가: 이 글을 네이버 블로그에서 구글 블로거로 옮겨 쓰는 현재(2017년 11월 9일). 이미 오래전에 윈도우 서버 2016 정식 버전에서도 플래쉬 사용을 가능하게 해주는 트윅이 공개되었다 --> "Windows Server 2016에서 Adobe Flash Player 설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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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6.

[책 리뷰] 자연은 ‘모자란 남자들’에게 가속감(加速感)을 선사했다(후쿠오카 신이치)

Bastards men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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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모자란 남자들’에게 가속감(加速感)을 선사했다

원제: できそこないの男たち by 福岡 伸一
아담이 이브를 만든 게 아니다. 이브가 아담을 만든 것이다. (『모자란 남자들』, 137쪽)

세기의 쓰인 대로 여자는 정말 남자의 갈빗대 하나로 만들어진 걸까? 혹은,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 남성중심적이면서도 기가 막힌 종교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당연히 과학은 “No”라고 대답한다. 여자가 만들어지고자 남자의 갈빗대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기본사양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태아는 염색체의 형태와는 상관없이 수정 후 약 7주째까지는 여성의 길을 간다. 이후 Y염색체가 발현돼야 비로소 남성으로 분화한다. 이때 난관, 자궁, 질의 근원이 되는 뮐러관(Muller管)은 봉합된다.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음낭과 항문 사이 회음부에 있는 이 봉합된 흔적을 볼 수 있다. 생명의 기본사양에서 Y염색체의 주문에 맞춰 진로를 변경한 것이 남성이며, 거기에는 주문 생산에 따르는 부정합과 오류가 있다. 이 부정합과 오류는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없고 단지 환경적 사회적 요인으로 차이가 생긴다는 일반적인 사고를 뒤집고 여성의 생물학적 우위로 나타난다.

어떤 시대든 어떤 지역이든 연령층이 어떻든 간에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수명이 길다. 남성은 여성보다 암에도 잘 걸리고 쉽게 감염된다. 일본의 통계를 보면 자살률에서도 무려 3배나 높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이것은 무리하게 기본값을 변경해서 남성으로 만든 것에 대한 부작용으로써 남성 호르몬 중 하나인 테스토스테론으로 말미암은 면역력 저하가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또한, 남자가 기본값을 벗어나 ‘모자란 남자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다른 누군가의 딸에게 전해주어 유전자를 혼합하기 위한 ‘운반자’로서의 임무 때문이라고, 대부분 남자가 하고자 하는 일도 바로 이것이라고 『모자란 남자들(できそこないの男たち)』의 저자 후쿠오카 신이치(福岡 伸一)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리고 만약 이 지구 상에 여성만 남는다면, 또는 남성만 남는다면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여성은 난자와 결합하는 정자를 생산하는 기능 한 가지만 더 추가되도록 진화한다면 자가 번식할 수 있다. 그러나 남성은 난자뿐만 아니라 자궁, 골반, 젖 등 자가 번식을 위해 추가되어야 할 생물학적 기능과 변화는 한둘이 아니다.

기까지만 보면 『모자란 남자들』은 여성의 생물학적 우위를 강조하는 페미니즘적 사고를 담은 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책 마지막에 펼쳐지는, “남자는 왜 여성을 섬기는 것일까?”라는 철학적, 생물학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해설이 가능하지만 명확한 답은 없는 의문에 대한 후쿠오카 신이치의 기발한 가설을 펼치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다. 이 가설의 핵심은 제트코스터가 정점에서 막 하강하려고 할 때 느끼는 쾌감, 즉 기존의 오감에 이어 가속각(加速覺)이라는 새로운 감각의 정의이다. 그렇다면 가속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모자란 남자들’이 삶에서 느끼는 최상의 쾌감이고 이 세상을 사는 유일한 보상이자 목적인 바로 ‘사정(谢精)’이다.

동물은 매체 속에 잠겨 매체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이 매체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듯, 우리 인간은 매체로서의 시간의 존재를 자각할 수 없다.

시간의 존재를,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위가 있다. 시간의 추월. 순항하고 있는 시간을 한순간이라도 추월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시간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시간의 풍압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가속각인 것이다.

순항하는 시간을 추월하기 위한 속도의 증가,그것이 가속도다. 가속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시간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은 최상의 쾌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직접적으로 삶을 실감하는 방법 이기 때문이다.

(생략)

그리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모자란 남자들’이 이 세상을 사는 유일한 보상으로, 가속각과 연결된 사정(谢精)감이 선택된 것이다. (231~232쪽)

자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의 책은 과학서로는 보기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좋다. 그만큼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과학서라는 얘기이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학술적 이야기를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 유학 시절 등 실제로 체험한 경험에 자연스럽게 엮는다. 마치 수필을 읽는 듯한 부드럽고 친근한 분위기가 과학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독창적이다. 또한,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일반적인 과학서의 절반 정도의 두께로 대폭 축소한 점도 장점이 될 수 있다. 책이 얇은 만큼 많은 주제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를 다루더라도 저자 특유의 유창하고 명쾌한 입담으로 독자를 확실하게 매료시키고 이해시킬 수 있는 과학서이다. 반면에 책이 얇고 주제를 축소하고 다양한 지식을 담기보다는 이해도를 높이는데 충실한 만큼 깊이와 세밀함은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과학서적에서 깊이와 세밀함 같은 전문성을 갖추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는 책은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전문성과 대중성은 마치 시소처럼 적당한 균형점을 잡을 수는 있을지언정 어느 한 곳이 우세하면 그 반대쪽이 열세를 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요구하기는 욕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모자란 남자’라면, 아니면 생물학적으로 우세한 여자일지라도 저자가 들려주는 의아하고도 기발한 이야기는, 오늘도 적당한 상대를 찾으려고 우왕좌왕하는 수고스러운 과업으로 지치고 상처받은 당신의 울적한 기분을 치유하기 위한 사색의 시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리뷰는 2016년 8월 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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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2.

윈도우 앱/스토어 오류 - "앱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벤트 오류 5973)

[이벤트 뷰어] Windows 로그/응용 프로그램

앱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오류로 인해 Microsoft.WindowsCalculator_8wekyb3d8bbwe!App 앱을 활성화하지 못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Microsoft-Windows-TWinUI/Operational 로그를 참조하세요.

[이벤트 뷰어] 응용 프로그램 및 서비스 로그

/Microsoft/Windows/Apps/Microsoft-Windows-TWinUI/Operational

Windows.Launch 계약에 대한 Microsoft.WindowsCalculator_8wekyb3d8bbwe!App 앱의 ActivateApplicationForContractByAppIdAsUserWithHost가 앱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으)로 실패했습니다.

라는 이벤트 오류 기록과 함께 앱이 시작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나 같은 경우 이 오류의 원인은 C:\Program Files\WindowsApps 폴더의 권한을 변경한 것이 문제였다. 원래 이 폴더는 일반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접근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앱을 임의로 삭제하고자 소유권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사용자 권한을 할당하면 이 폴더에 있는 앱은 더는 실행이 안 된다. 이럴 때 해결 방법은 WindowsApps 폴더에 "All Application Packages" 그룹에 기본(읽기/실행) 권한을 주면 된다.

이 리뷰는 2016년 8월 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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