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9

상하이 | 격동의 도시에 휘감긴 한 지식인의 번뇌

Shanghai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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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 주인을 잃고 부침하는 격동의 도시에 휘감긴 한 지식인의 번뇌

원제: 上海 by 横光 利一
“그야 그렇지. 여기는 이상이랄지 희망이랄지 그런 것은 전혀 가질 수가 없어. 우선 여긴 그런 것은 통용되지 않아 통용되는 것은 돈뿐이지. 그것도 그 돈이 가짜인지 아닌지를 일일이 사람의 면전에서 살펴보고 나서가 아니면 통용되지 않아.” (『상하이』, 119쪽)

신감각파 작가 요코미쓰 리이치(横光 利一)의 『상하이(上海)』는 열강들의 치열한 이권다툼 속에서 주인을 잃고 부침하는 격동의 도시 상하이와 그 소용돌이 속에서 번뇌하는 지식인의 내면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신감각파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답게 표현의 미학을 중시한 『상하이』는 활기차면서도 어딘가 암울하고 억눌린 듯한 1920년대 상하이라는 도시의 특색을 절묘하게 포착했다. 도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은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등장인물들 내면의 갈등과 고뇌의 흐름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도시의 모습과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대한 감각적 묘사에 중점을 두었다지만, 사상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당시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지키고자 아시아의 결합을 주장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비슷한 개념인 아시아주의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시아주의자로 자처하는 야마구치는 중국의 무력한 모습을 보며 일본의 군국주의야말로 동양에서 백인종의 위협을 막아 주는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비단 아시아주의는 일본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상하이(上海)』에서 야마구치의 인도인 동지이자 국민의회파인 암리 역시 아시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 두 아시아주의자의 공통된 주장인 백인에 대한 황인종의 단합은 시대적으로 충분히 거론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임은 분명하나 야마구치는 그 중심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둠으로써 일본보다 근대화에 뒤진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명분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한다.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심의 한 발로로 암리 같은 아시아의 많은 지식인이 평화적이고 평등한 입장에서 아시아주의를 주창했지만, 그 이면에 숨은 교활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진짜 의도를 간파하기는 쉽지 않았음을 작품은 보여준다.

소설 곳곳에는 ‘XX’로 나타나는 검열의 증거도 있다. 이 검열의 흔적은 작품의 주요 배경이자 이야기 전개의 전환점이 되기도 하는 5·30(1925년) 운동 이후 민족적 자각을 얻은 중국 민중의 외침을 다루는 장면에서 주로 등장한다. ‘XX를 쳐부수자’, ‘XX인들 타도하자’ 등 ‘XX’ 대신 ‘일본’을 대입하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명백한 반(反)일본적인 문장들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XX’가 ‘일본’이 아닌 ‘영국’에도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에는 주로 일본의 마수만 뻗친 데 반해 중국은 많은 열강으로부터 지배를 강요당했기 때문이리라. 영국과 일본의 동맹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열을 당했다고 해서 요코미쓰 리이치가 일본 군국주의에 비판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검열을 당한 문구는 신문 기사 같은 사실적 표현의 결과일 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표현을 중시한 신감각파 문학답게 작품 어디에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없다.

그러므로 요코미쓰 리이치의 『상하이(上海)』를 당시 전 세계적으로 팽배한 제국주의 세력과 그들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약소민족 간의 대립으로, 또는 사회나 어떤 체제의 부조리를 지탄하고 고발하는 문학으로 읽는다는 것은 이 책의 가치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한 잣대로 보면 재미도 없고 별로 볼 것도 없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1920년대 상하이라는 도시의 정경을 그대로 독자의 머릿속으로 심어놓은 것 같은 풍부한 묘사 와 당시 상하이가 세계 경제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용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상황, 그리고 전통적인 도덕관과 가치관을 지닌 양심적인 지식이자 주인공인 산키가 상하이라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겪는 가치관의 혼란, 제국주의적 억압에 반동하여 들고 일어난 중국 민중에 대한 산키의 동정과 그로 말미암은 애국심 사이에서의 갈등, 일본에 있는 잊지 못하는 짝사랑과 상하이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번민이다. 마지막으로 역동적인 시위 현장을 설탕이 우유에 녹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은 마치 영화의 슬로 모션을 보는 것처럼 인상적이다.

인도,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미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주인인 중국인을 깔아뭉갠 다음 꿰차고 들어앉아 안방마님처럼 행세하는 상하이. 미국 수병들은 지팡이를 휘둘러 개를 패듯 인력거꾼을 때리며 재촉한다. 인기척 없는 어느 집 마당출구의 땅바닥 위에는 살해된 중국인 시체가 버려진 쓰레기처럼 그대로 방치된다. 어느 외국인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중국인 시체에서 뼈를 추려내어 만든 의학용 백골로 부자가 된다. 지저분한 골목에서 돼지 뼈를 핥는 소녀의 입 가장자리에는 까슬까슬하게 버짐이 잔뜩 피어 있다. 억압과 착취, 그리고 가난과 기아가 진흙탕처럼 뒤범벅된, 그럼에도 아침이면 여러 나라 언어가 뒤섞인 시끌벅적하지 않은 소음 속에서 사람들이 일말의 희망을 품고 활기찬 물결을 이루며 대로로 기세 좋게 스며드는 곳. 종이 한 장 차이로 부와 가난,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곳. 사람들 마음속에서 솟아난 희망은 뭉게뭉게 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강이 되어 흐르고, 사람들이 흘린 피를 양분으로 성장하는, 고색창연함 속에 토해내지 못한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묻힌 그곳은 바로 상하이다.

이 리뷰는 2016년 7월 19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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