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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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30.

[책 리뷰] 꿈마저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샤이어’ 같은 위안을 주는 ~ 호빗(톨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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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저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샤이어’ 같은 위안을 주는

원제: The Hobbit by J. R. R. Tolkien
“매우 친절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내게 걱정거리만 만들어 주는 겁니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그 보물을 다 싣고 집으로 가겠습니까? 도중에 틀림없이 전쟁이나 살인이 일어날 텐데요. 그리고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 많은 보물을 내가 무엇에다 쓰겠습니까? 그러니 그 보물은 당신 손에 있는 것이 더 낫습니다.” (『호빗(The Hobbit)』, 420쪽)

킨(J. R. R. Tolkien)의 『호빗(The Hobbit)』은 판타지 문학의 고전 명작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의 60여 년 전 이야기를 다른 작품으로, 간달프 꼬임에 넘어간 골목쟁이네 빌보가 참나무방패 소린과 그의 동료 난쟁이들과 함께하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반지의 제왕』처럼 『호빗』 역시 3부작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원작 6권을 두 권씩 하나로 묶어 총 3부로 제작되었다. 소설 두 권 분량은 한 편의 영화로 전부 그려내기에는 상당한 양인 만큼 영화는 원작의 상당 부분을 생략하고 그 생략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각색을 통해 훌륭하게 다듬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영화 「호빗」의 원작은 달랑 한 권이다. 이 한 권을 가지고 3부작으로 나누어 제작한 만큼 원작에 없는 많은 이야기가 덧붙어지고 부풀려졌다. 특히 빌보가 어둠숲 요정의 성에 갇힌 난쟁이들을 술통에 넣어(원작은 뚜껑까지 꽉 덮은 상태에서 오크들의 추격도 없이 무사히 호수 마을에 도착한다) 강으로 흘려보내는 탈출 장면부터 시작하여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술통, 강기슭을 따라 내리달으며 난쟁이들을 맹렬하게 추격하는 오크들과 그 오크들을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민첩하게 사냥하는 요정들이 펼치는 스릴감 넘치는 액션은 원작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장면 중 하나다. 영화 「호빗」 3부작 중 마지막 편인 ‘다섯 군대 전투’는 몇 페이지 안 되는 전쟁 장면을 스펙타클한 그래픽으로 웅장한 영상을 빚어냄으로써 관객을 압도한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소유자에게 ‘투명인간’이라는 초현실적인 힘을 부여하는 ‘절대반지’가 등장한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압력에 눌린 인간 내면에 잠재한 부도덕한 욕망을 은밀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거부하기 어려운 타락한 매력이다. 현실에서 권력과 재력을 꿰찬 이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절대반지만 있으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투명인간이 되는 상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상상력을 엿 바꿔 먹은 무뇌충이거나 짐짓 점잖은 척하는 위선자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절대반지가 내뿜는 유혹은 매우 강렬하다 못해 이름 그대로 ‘절대’적이다.

반면에, 『호빗』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유혹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시시각각 우리의 눈을 멀게하는 ‘부(富)’이다. 소린의 할아버지 스로르는 현명한 조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부를 쌓다 난쟁이들만큼이나 금과 보석 등의 보물을 좋아하는 용 스마우그의 침략을 받고는 끔찍한 파멸을 맞는다. 스마우그는 사용할 줄도 모르고 사용할 필요도 없는 금과 보석을 지키려다 축복받은 영생의 삶을 비참하게 마감한다. 외로운 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모험을 잘 이겨낸 소린은 스마우그가 죽고 마침내 용에게 빼앗긴 수많은 보물을 되찾자 황금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는다. 결국, 그도 자신의 선조처럼 지나친 탐욕의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영화에서 소린을 비롯한 난쟁이들은 멋진 활약도 종종 펼치지만, 원작에서 그들은 모험에서 그렇게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은 ‘좀도둑’, ‘채소장수’라고 멸시하는 빌보에게 염치 불고하고 위험한 일 대부분을 미루거나 부탁하고, 빌보는 그러한 난쟁이들의 파렴치한 기대에 멋지게 부응해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다. 난쟁이들은 오직 빌보의 예상 밖의 활약 덕분에 험난한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외로운 산에 도착했을 땐 영화에서와는 달리 난쟁이들도 빌보가 가진 반지의 힘을 알고 있었기에 이때부턴 대놓고 어렵고 위험한 일은 모두 빌보에게 떠넘긴다. 난쟁이들을 거미 밥상에서, 그리고 요정 감옥에서 구출해 준 것, 외로운 산의 비밀 입구의 열쇠 구멍을 발견하고 호빗 특유의 예리한 눈으로 스마우그의 약점을 발견한 것도 빌보의 지혜와 용기 덕분이었다. 물론 반지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또한, 빌보는 정정당당하게 얻은 전리품인 ‘아르겐스톤’의 소유를(영화에서와는 달리 원작에서는 빌보가 용의 소굴에서 아르겐스톤을 발견하고 감출 때까지 아무도 아르겐스톤과 그것이 가진 의미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는다) 난쟁이들과 요정/인간 연합군과의 전쟁을 막고자 하는 선량한 목적에서 기꺼이 포기하고는 바르드에게 맡긴다. 이 숭고한 장면을 곁에서 직접 목격하는 요정 왕과 간달프는 빌보의 과감한 행동과 깨끗한 마음에 감탄과 함께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빌보는 절대반지에 대한 끈질긴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노회하고 안타까운 모습을 종종 보여주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빌보는 적당한 욕심에 선량한 마음도 적당히 갖춘, 그리고 때에 따라 불굴의 의지와 뜻밖의 용기도 보여주는 꽤 괜찮은 호빗이다. 이러한 것들이 툭 집안의 기질이라고는 하나, 아무튼 그러한 절제와 양보의 미덕이 있었기에 빌보의 모험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고, 모험 내내 꿈에 그리던 그립고 정겨운 고향 샤이어로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판티지소설의 고전 『반지의 제왕』을 읽고 『호빗』을 읽는다면 뭔가 부족함에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반지의 제왕』이라는 대작을 완성하기 위한 밑거름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원작보다 더 방대한 이야기를 펼쳐낸 영화와 책을 함께 보면 원작의 허전함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 책을 봐야 한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그것은 모험 내내 틈만 나면 도지는 빌보의 향수병과 비슷하다. 외지에서 추위에 떨고 허기지고 지치고 피곤하면 당연히 집이나 고향 생각이 나듯 삭막하고 황폐한 도시의 삶에 지친 나머지 달콤해야 할 새벽의 꿈마저 단조롭고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톨킨의 문학은 위안과 휴식, 그리고 풍부한 꿈의 재료를 제공해주는 정신적 고향이다.

이 리뷰는 2017년 7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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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24.

[책 리뷰] 고뇌하는 지식인의 참모습 ~ 대화(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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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지식인의 참모습

원제: 대화 by 리영희
나는 언제나 이처럼 우리 군부나 정보부나 극우 • 반공 • 반통일적 전쟁주의자들이 몽매한 국민을 속여가며 그들의 정권 연장을 도모하고 민족의 화해를 거부하는 그들의 주장의 가면을 벗기기를 사명으로 여겼지. 대중에게 진실을 밝히고 깨우쳐주려고 했어요. 그리고 자랑은 아니 지만 상당한 성과를 이룩했지. (『대화』, 646쪽)

리영희 선생의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는 많은 청년 • 학생 • 지식인들에게는 ‘사상의 은사’로 추앙받고, 권력으로부터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온갖 핍박을 받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한 지식인의 자서전이다. 집필 당시 저자의 건강 문제로 『대화』는 독특하게 대담 형식을 선택했다. 그래서 문장을 눈으로 읽는다기보다는 귀로 듣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때론 종이 속의 글자들이 툭툭 부대끼는 소리가 공명하는 것이 마치 대담 현장에서 방청하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대담의 상대자는 저자와 상당한 친분이 있는 후배이다 보니 비록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토론함에도 선후배 사이의 소탈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독자는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의 대담을 따라갈 수 있다. 또한, 이런 간접적인 체득을 통해 상대 질문의 요지를 꿰뚫거나 반박하고 비판하는 논리적인 토론의 한 방법도 배운다.

그러나 무엇보다 독자에게 소중한 경험은 고(故) 리영희 선생의 일생을 점유하는 자아성찰이라는 거울에 독자의 내면을 비춰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의식의 성숙이다. 해방 후 잠시 교직에 있었을 때는 피난갈 돈을 마련하느냐 다른 교사들과 합세하여 학교 금고를 털기도 하고, 한국전쟁 중 ‘유엔군 연락 장교단’에서 장교로 근무할 때는 마음에 드는 기생과 하룻밤을 보내려고 권총까지 쏘며 위협하다가 오히려 기생에게 호된 꾸중을 듣기도 한다. 권력에 압력으로 조선일보사에서 쫓겨났을 땐 먹고 살고자, 그리고 육체노동자들의 삶의 애환과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자 육체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지만, 천상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하며 서글픔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돈 때문에 논문을 대신 써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하면, 교도소의 절도범이 수용된 감방에서 지냈을 적엔 사회의 최하층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삶과 정서를 이해하고자 가까이 접근해보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저자는 지식인으로서의 서글픈 한계를 깨닫는다.

처럼 누구나 가지는 인간적 결점을 가진 채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때론 적당히 타락하기도 했던 저자가 시대를 뛰어넘는 ‘사상의 은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단점과 잘못, 그리고 붓으로 먹고사는 지식인의 한계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며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자기 수양에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인지한 저자는 행동가나 선동가로 나서기보다는 자신의 특기이자 장점인 혜안과 통찰력을 살려 국민이 보지 못하는, 아니 볼 수 없는 현실과 미래를 글로서 깨우치는 선구적 계몽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저자는 스스로 부과한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맨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한국 국민이 전혀 알지 못하는 자기 운명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과 진실, 이런 것을 밝혀서 그들의 ‘의식의 눈’을 뜨게 하는 계몽자라고 밝힌다. 한마디로 곧게 자란 나무라도 듬성듬성 잔가지가 솟아나듯 가끔은 보통 사람처럼 일탈에 빠지면서도 진실을 추구하고 그것을 모든 사람과 나누어야 한다는 신념만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삶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해서 ‘무뇌충’을 떠올릴 필요까지는 없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찌 아무 생각도 없을 수가 있겠는가. 단지 그 생각이라는 것이 오로지 자신, 또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 정도의 안위와 이익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사회나 국가, 더 나아가 세계로까지는 확대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세계 여행을 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껴도 그것이 오직 충동적인 감흥에만 머무르고 새로운 인식으로의 전환과 의식의 확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으며 그 여행은 돈과 시간을 낭비해 허영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 세상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겠는가. ‘의식화’되지 못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역사가 보여주었듯 반인간적인 노예 제도에서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자본주의의 부당한 착취에서도 감지덕지하며 무탈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민중 대부분은 그러했으며 우리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정부와 권력, 기업들도 노예처럼 순진하고 기계처럼 부려 먹을 수 있는 이러한 사람들을 원한다.

‘지식인’, ‘계몽가’, ‘사상가’ 등을 언급하다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한국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저자처럼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일본인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학살’, ‘식민지배’ 등의 뒷받침되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여 일본인을 선동하고 세뇌시킨 장본인이다.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메이지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지식인으로 여전히 꿋꿋하게 존재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해야 할 의무를 가진 명망 있는 지식인이 비양심적인 잘못된 길을 걸었을 때 가져올 수 있는 엄청난 파국을 볼 수 있다.

지식인의 책임은 막중한 것이며 영향력이 큰 저명한 지식인일수록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진정한 지식인은 한시도 고뇌의 끈을 놓칠 수가 없다. 현재 얻은 지식과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가혹한 지적 수련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바로 보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렇게 얻은 보편타당한 진실의 실마리를 아무 대가 없이 모든 이에게 기꺼이 전해줄 수 있는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이다. 독자는 고뇌하는 지식인에게서 시대적 과제와 역사적 잘못, 세상의 부조리를 진중하게 고민하는 ‘의식화’된 인간의 참모습을 보고 아기가 걸음마를 떼듯 ‘의식화’의 걸음마를 뗀다.

마지막으로 대담 중에 거론된 다양한 주제 중에 등장한 저자의 의견과 필자가 그동안 다방면의 걸친 독서를 통해 얻은 나름의 생각과 이해들이 일치한 부분도 꽤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에 걸친 필자의 독서 편력이 전혀 헛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으니 내겐 이보다 더 큰 위안을 없을 것이다.

이 리뷰는 2016년 7월 2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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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9.

[책 리뷰] 주인을 잃고 부침하는 격동의 도시에 휘감긴 한 지식인의 번뇌 ~ 상하이(요코미쓰 리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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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잃고 부침하는 격동의 도시에 휘감긴 한 지식인의 번뇌

원제: 上海 by 横光 利一
“그야 그렇지. 여기는 이상이랄지 희망이랄지 그런 것은 전혀 가질 수가 없어. 우선 여긴 그런 것은 통용되지 않아 통용되는 것은 돈뿐이지. 그것도 그 돈이 가짜인지 아닌지를 일일이 사람의 면전에서 살펴보고 나서가 아니면 통용되지 않아.” (『상하이』, 119쪽)

감각파 작가 요코미쓰 리이치(横光 利一)의 『상하이(上海)』는 열강들의 치열한 이권다툼 속에서 주인을 잃고 부침하는 격동의 도시 상하이와 그 소용돌이 속에서 번뇌하는 지식인의 내면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신감각파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답게 표현의 미학을 중시한 『상하이』는 활기차면서도 어딘가 암울하고 억눌린 듯한 1920년대 상하이라는 도시의 특색을 절묘하게 포착했다. 도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은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등장인물들 내면의 갈등과 고뇌의 흐름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도시의 모습과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대한 감각적 묘사에 중점을 두었다지만, 사상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당시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지키고자 아시아의 결합을 주장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비슷한 개념인 아시아주의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시아주의자로 자처하는 야마구치는 중국의 무력한 모습을 보며 일본의 군국주의야말로 동양에서 백인종의 위협을 막아 주는 유일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비단 아시아주의는 일본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상하이(上海)』에서 야마구치의 인도인 동지이자 국민의회파인 암리 역시 아시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 두 아시아주의자의 공통된 주장인 백인에 대한 황인종의 단합은 시대적으로 충분히 거론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임은 분명하나 야마구치는 그 중심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둠으로써 일본보다 근대화에 뒤진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명분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한다.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심의 한 발로로 암리 같은 아시아의 많은 지식인이 평화적이고 평등한 입장에서 아시아주의를 주창했지만, 그 이면에 숨은 교활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진짜 의도를 간파하기는 쉽지 않았음을 작품은 보여준다.

품 곳곳에는 ‘XX’로 나타나는 검열의 증거도 있다. 이 검열의 흔적은 작품의 주요 배경이자 이야기 전개의 전환점이 되기도 하는 5·30(1925년) 운동 이후 민족적 자각을 얻은 중국 민중의 외침을 다루는 장면에서 주로 등장한다. ‘XX를 쳐부수자’, ‘XX인들 타도하자’ 등 ‘XX’ 대신 ‘일본’을 대입하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명백한 반(反)일본적인 문장들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XX’가 ‘일본’이 아닌 ‘영국’에도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에는 주로 일본의 마수만 뻗친 데 반해 중국은 많은 열강으로부터 지배를 강요당했기 때문이리라. 영국과 일본의 동맹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열을 당했다고 해서 요코미쓰 리이치가 일본 군국주의에 비판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검열을 당한 문구는 신문 기사 같은 사실적 표현의 결과일 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표현을 중시한 신감각파 문학답게 작품 어디에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없다.

그러므로 요코미쓰 리이치의 『상하이(上海)』를 당시 전 세계적으로 팽배한 제국주의 세력과 그들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약소민족 간의 대립으로, 또는 사회나 어떤 체제의 부조리를 지탄하고 고발하는 문학으로 읽는다는 것은 이 책의 가치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한 잣대로 보면 재미도 없고 별로 볼 것도 없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1920년대 상하이라는 도시의 정경을 그대로 독자의 머릿속으로 심어놓은 것 같은 풍부한 묘사 와 당시 상하이가 세계 경제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용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상황, 그리고 전통적인 도덕관과 가치관을 지닌 양심적인 지식이자 주인공인 산키가 상하이라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겪는 가치관의 혼란, 제국주의적 억압에 반동하여 들고 일어난 중국 민중에 대한 산키의 동정과 그로 말미암은 애국심 사이에서의 갈등, 일본에 있는 잊지 못하는 짝사랑과 상하이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번민이다. 마지막으로 역동적인 시위 현장을 설탕이 우유에 녹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은 마치 영화의 슬로 모션을 보는 것처럼 인상적이다.

도,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미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주인인 중국인을 깔아뭉갠 다음 꿰차고 들어앉아 안방마님처럼 행세하는 상하이. 미국 수병들은 지팡이를 휘둘러 개를 패듯 인력거꾼을 때리며 재촉한다. 인기척 없는 어느 집 마당출구의 땅바닥 위에는 살해된 중국인 시체가 버려진 쓰레기처럼 그대로 방치된다. 어느 외국인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중국인 시체에서 뼈를 추려내어 만든 의학용 백골로 부자가 된다. 지저분한 골목에서 돼지 뼈를 핥는 소녀의 입 가장자리에는 까슬까슬하게 버짐이 잔뜩 피어 있다. 억압과 착취, 그리고 가난과 기아가 진흙탕처럼 뒤범벅된, 그럼에도 아침이면 여러 나라 언어가 뒤섞인 시끌벅적하지 않은 소음 속에서 사람들이 일말의 희망을 품고 활기찬 물결을 이루며 대로로 기세 좋게 스며드는 곳. 종이 한 장 차이로 부와 가난,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곳. 사람들 마음속에서 솟아난 희망은 뭉게뭉게 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강이 되어 흐르고, 사람들이 흘린 피를 양분으로 성장하는, 고색창연함 속에 토해내지 못한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묻힌 그곳은 바로 상하이다.

이 리뷰는 2016년 7월 19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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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5.

평면 스캐너 사용시 책 안쪽까지 깔끔하게 스캔하기

평면 스캐너로 고급스러운 양장 제본이 아닌 일반 서적에 많이 사용되는 무선 제본으로 된 책을 스캔하다 보면 위의 예시처럼 책 가운데가 살짝 들리기 때문에 책 안쪽이 흐릿하게 스캔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위의 예시에 사용된 책은 안쪽 여백에 여유가 있는 편이라 힘 조절을 잘하면 굳이 책받침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일일이 스캔 결과를 확인하기는 번거롭기에 책받침을 사용하여 확실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반면에 안쪽 여백의 여유가 없을수록 책받침을 필수적이다 .

나는 책받침으로 두툼한 박스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사용 중이다. 책받침은 힘을 안쪽까지 균등하게 분배시켜주며 종이를 평평하게 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적은 힘을 들이고도 깔끔한 스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 그래서 물에 젖었다 마른 것처럼 쭈글쭈글한 종이도 아무런 흔적 없이 깨끗하게 스캔된다. 스캔할 쪽에서 종이 두께에 따라 30~50쪽 뒤나 앞으로 책받침을 책에 삽입한 다음 20쪽 정도 스캔한 다음 다시 앞의 간격으로 책받침을 옮겨 책 사이에 끼우면 된다. 이런 식으로 20쪽마다 한 번씩 스캔 결과물을 확인하면서 안쪽까지 제대로 스캔이 되었는지, 빠진 쪽은 없는지 확인한다.

양장본 혹은 안쪽 여백이 충분한 책이라도 알게 모르게 종이들이 유리에 완전히 밀착되지 않고 살짝 뜨는 경우가 많기에 평면 스캐너로 책을 스캔할 때는 받침대 사용을 적극 추천한다.

이 리뷰는 2016년 7월 15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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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4.

Windows 리소스 보호에서 복구 서비스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SFC PROBLEM WINDOWS RESOURCE PROTECTION COULD NOT START THE REPAIR SERVICE FIXED IN 14291

위 링크에서 제시한 'Windows 리소스 보호에서 복구 서비스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문제 해결 방법

@echo off
cls
setlocal
set root=%SystemRoot%\WinSxS\%PROCESSOR_ARCHITECTURE%_microsoft-windows-servicingstack
for /f "delims=" %%A in ('dir /ad /b %root%-onecore*') do set "from=%SystemRoot%\WinSxS\%%A"
for /f "delims=" %%A in ('dir /ad /b %root%_*') do set "to=%SystemRoot%\WinSxS\%%A"
takeown /F %to%\* /R /A 1>nul
icacls %to%\*.* /T /grant administrators:F 1>nul
echo on
echo F|xcopy /C /R /O /Y %from%\wrpint.dll %to%\wrpint.dll
pause

윈도우 시스템 파일 복구 검사인 'sfc /scannow'를 수행하면 'Windows 리소스 보호에서 복구 서비스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Windows Resource Protection could not start the repair service)'라는 에러가 뜨면서 검사가 안 될 때가 있다. 이때 원문 링크에 제시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메모장을 이용해 위의 명령어들을 배치 파일로 만들어 (아니면 scanfix.cmd 다운로드) 관리자 권한으로 실행하면 끝. 이 문제는 내가 윈도우를 (포맷 없이) 어느 정도 사용하다 보면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였는데, 오랜 구글링 끝에 이 방법으로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이 리뷰는 2016년 7월 1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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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3.

12bit HEVC 동영상은 다음팟플레이어 64비트를 추천

벌써 고효율 비디오 코딩(HEVC/H.265/x.265)을 사용한 동영상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H.264/AVC 방식으로 인코딩했을 때와 대비해 같은 화질에 절반 이하의 용량만 차지할 정도로 압출률이 매우 뛰어나지만, 그만큼 CPU 자원을 많이 차지하고 최신 GPU를 제외하고는 GPU 하드웨어 가속 혜택도 볼 수 없기에 올드PC에겐 마냥 기쁘고 반갑기만 한 녀석은 아니다.

그런데 다음팟플레이어 64비트 버전을 사용하면 내 구닥다리 CPU에서도 12bit HEVC 동영상이 매끄럽게 재생된다. 반면 다음팟플레이어 32비트는 재생은 되지만, 영상과 음성 싱크가 어긋날 정도로 버벅거려 실질적인 감상은 불가능하다. 다음팟플레이어에 외장 코덱인 HEVC 전용 디코더 Lentoid HEVC Decoder를 등록하여 재생할 수도 있으나, 이 방법은 아직 완전치가 않은 것이 예시에 사용된 동영상은 Lentoid HEVC Decoder로 재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디코더로 재생되는 12bit HEVC 동영상 파일이 있었는데, 다음팟플레이어 32비트에서도 무난하게 재생이 될 정도로 괜찮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또한, Lentoid HEVC Decoder는 지금은 테스트 단계이지만, OpenCL을 활용한 GPU 가속도 지원하고 있다. 앞으로 기대해볼 만한 녀석인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현 단계에서 12bit HEVC 동영상 재생은 다음팟플레이어 64비트가 가장 좋은 것 같다. 참고로 MPC-HC, 미플+LAV 코덱, VLC 등은 예시 파일을 재생조차 못 했다.

이 리뷰는 2016년 7월 13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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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12.

[책 리뷰] 기계론적 생명관에 일침을 가해라 ~ 동적평형(후쿠오카 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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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론적 생명관에 일침을 가해라

원제: 動的平衡: 生命はなぜそこに宿るのか by 福岡伸一
즉,생명은 기계가 아니다. 거기에는 기계와는 전혀 다른 다이너미즘이 존재한다. 생명이 갖는 유연함,가변성,그리고 전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기능 一 그것을 나는 ‘동적인 평형상태’라 부르고 싶다. (『동적평형』, 135쪽)

‘동적평형(動的平衡, dynamic equilibrium)’, 움직임이 평형을 유지한다?

'동적평형'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루돌프 쇤하이머(Rudolf Schoenheimer)라는 과학자였다. 그는 분자의 행방을 추적하는 실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쥐의 몸속으로 들어간 아미노산이 연소하면서 에너지로 변하고, 연소한 가스는 호흡이나 소변의 형태로 신속히 배출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동위체 표식한 아미노산은 쥐의 온몸으로 퍼지면서 모든 장기와 조직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쥐의 몸무게는 전혀 늘지 않았다. 이 놀라운 발견은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과 왓슨(James Dewey Watson)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기 10여 년 전에 일어났지만,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곧 잊혔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 기계론적 생명관의 지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뿐더러 곧 분자생물학 시대로 진입하면서 기계론적 생명관이 더욱 활기를 띠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이머의 발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생명은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재구축하면서도 정교한 균형을 유지하는 질서를 유발하는 ‘흐름’이다. 즉, 생명이란 동적인 평형 상태에 있는 시스템이며 생명현상이란 기계처럼 틀이 잡힌 구조가 아니라 질서 있는 흐름이 유발하는 ‘효과’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음식물로부터 이 ‘흐름’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와 다양한 분자들을 섭취하면서 끊임없이 죽어가는 세포들을 대체한다. 이로써 우리 몸의 모든 장기와 조직들은 엔트로피는 일반적으로 보존되지 않고 시간에 따라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개체의 생명은 영원할 수 없다. ‘열역학 제2법칙’과의 투쟁에서 결국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개체는 죽음을 맞이한다. 나름대로 훌륭한 오류 수정 방법을 고안해 낸 유전자와 세포들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축적된 오류들은 생명 유지에 치명적으로까지 작용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노화로 말미암은 죽음이다. 그럼에도, 이 패배는 거시적으로 보면 결코 치명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노화로 죽어가는 생명 대부분은 이미 번식을 끝마친 상태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음도 생명 순환의 영속적인 고리를 끊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이 죽음조차 생명 활동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을 포함해 다른 생명의 죽음에서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생태계 구성을 보면 죽음은 곧 다른 생명의 탄생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싼 자연은 마음 내키는 대로 착취하고 파괴해야 할 소모적인 자원이나 거치적거리는 장애물, 또는 가끔 안식과 휴식을 취하는 휴양지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흐름’을 관장하는 주체자이다. 우리가 지금처럼 기어코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제명을 깎아 먹는 일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연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지만, 자연은 사람 없이도 수억 년 이상을 잘 지내왔으니까. 우리는 모두 흙에서 오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 새삼스럽게 다시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학 교양도서치고는 매우 얇은 편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얕잡아 볼 수 없는 책이 바로 후쿠오카 신이치(福岡伸一)의 책이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 『모자란 남자들』에 이어 『동적평형』에서도 수필처럼 친근하고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기습처럼 핵심을 찌르며 독자의 감탄을 자아내는 능력은 명불허전이다. 『동적평형(動的平衡: 生命はなぜそこに宿るのか)』은 생명에 대한 명쾌한 이야기와 일상에서 오해하기 쉬운 분자생물학과 관련된 알쏭달쏭한 과학적 상식들을 쉽게 풀어씀으로써 누구나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도 큰 장점이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이 책을 발판으로 지적 호기심의 가지를 넓고 다양하게 펼쳐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본다는 말이 있다. 일례로 귀신을 봤다는 것은 귀신을 믿을 정도로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뜻이며, 그래서 인류의 종교가 여전히 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 지적 성실함을 스스로 포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종교가 21세기에 첫 등장 했다면, 지금처럼 흥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아무튼, 더욱 많은 것을 보고 세상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좀 더 유연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지식은 필수다. 이 때문에 지적 호기심은 충분히 자극될 필요가 있으며, 후쿠오카 신이치의 책은 괜찮은 지적 흥분제이자 자극제이다.

이 리뷰는 2016년 7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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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6.

[책 리뷰] ‘재분배’라는 명분 뒤에 숨은 복수의 집념 ~ 그레이맨(이시카와 도모타케 )

Grey Men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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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분배’라는 명분 뒤에 숨은 복수의 집념

원제: グレイメン by 石川 智健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현실을 타파하고 강자의 지위에 올라선 자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 역시 혜택받은 자들이야. 그럴만한 환경이 갖춰졌거나 좋은 사람을 만났거나 남다르게 뛰어난 두뇌를 가졌거나 운이 좋았던 거지. 하지만 이 세상에는 진짜 약자들이 많아. 그들에게 노력이 부족했다고 타박하는 것은 약자의 입장에 서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그레이맨(グレイメン)』, 421쪽)

(性)을 사고파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아 목숨까지 경매하는 타락한 세상, 유괴된 모녀가 성폭행당하고 살해되는 사건조차 동물원의 원숭이 같은 구경거리가 되는 잔혹한 세상, 가해자들이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하는 아리송한 세상, 약자의 하소연은 그대로 짓밟히는 비참한 세상.

부와 권력을 움켜쥔 채 정의와 법 위에서 군림하던 오만방자한 자들에 대한 단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회색 정장에 회색 조끼 등 온통 회색으로 도배한 ‘그레이맨’이 존재한다. 그는 돈과 권력, 그리고 무정한 사회에 치인 사람들이 겪는 ‘몸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 폐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이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절망감. 몸의 세포가 모조리 다 타버릴 듯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에 목이 졸려버린 슬픔.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자기혐오’로 지옥 같은 이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을 때, 그들을 구원하여 자기편으로 만들어나가면서 하나의 거대한 조직을 만든다. 조직의 태생이 돈과 권력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은 배신이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조직이다. 기업의 유일한 목표가 ‘이익’이듯 이 조직의 유일한 목표는 ‘재분배’다.

시카와 도모타케(石川 智健)의 소설 『그레이맨(グレイメン)』의 일면에는 가부장적인 전통적 가치관의 도를 넘어선 붕괴가 가져온 아버지라는 존재의 말살과 그로 말미암은 일본 가정의 위기와 비극을 다루긴 했지만, 역시 이 소설의 묘미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법과 정의를 농락하면서 안전하게 자신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는 부와 권력을 독차지한 강자들을 향한, 그리고 이들을 묵인한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세상을 향한 ‘그레이맨’의 명쾌한 고발과 통쾌한 복수다. 누군가는 제멋대로인 것 같은 거칠고 난폭한 그들의 복수극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지만, 답답하고 제멋대로인 세상에 울분이 쌓인 독자에겐 나름의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충격적이면서도 시원시원한 작품이다. 혹자는 저자 이시키와 도모타케가 『그레이맨(グレイメン)』을 통해 고발한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부패 등을 과대 포장된 것으로 격하하며 자위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들이 저지른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벗어난 온갖 범죄들이 소설이라는 가상의 현미경을 들이대고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보통 사람은 미처 알아챌 수가 없을 정도로 돈이라는 검은 안개와 권력이라는 튼튼한 친위대에 둘러싸여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회색으로 도배한 옷을 입고 다녀 붙여진 ‘그레이맨’이라는 명칭에 대해 작품은 외계인 같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달리 보면 ‘회색’은 검은색도 아니고 흰색도 아닌 바로 그 중간에 있는 색이다. 악을 지배하는 흑마법도 아니고 선을 지배하는 백마법도 아니다. 부와 권력이 지배하는 흑(黑)에 가까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이 만연하는 백(白)에도 속해있지 않다. 즉 재분배를 위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인 공정과 평등을 의미하는 색, 검은색과 흰색을 섞어야만 나오는 색, 바로 그런 중용의 가치관을 지닌 색이 ‘그레이’는 아닐까.

이 리뷰는 2017년 7월 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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