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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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30.

[책 리뷰]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 왜 책을 읽는가(샤를 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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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Original Title: Pourquoi lire? by Charles Dantzig
책은 결코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 책은 인생이다. 진지하고 난폭하지 않은 삶, 경박하지 않고 견고한 삶, 자긍심은 있되 자만하지 않는 삶, 최소한의 긍지와 소심함과 침묵과 후퇴로 어우러진 그런 삶이다. 그리고 책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초연히 사유의 편에 선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왜 책을 읽는가(Pourquoi lire?)』, p257)

“왜 나는 책을 읽는가?”

“왜 우리는 책을 읽는가?”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독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상투적이면서도 가장 무난한 대답에서부터, 인생의 길고도 긴 지루한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려고, 사심 없는 순수한 지적 욕구로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고, 누군가에게 독서량을 자랑하려고, 조금은 노골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중에서 가장 솔직한 대답일 것 같은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는 등까지 별의별 대답이 가능하지만, 이 대답들을 대충 흩어만 봐도 독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여타 이기적인 행동과는 구별이 되지만, 여하튼) 충분히 이기적인 행동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자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급조한 궁색한 대답들이 현실과는 얼마나 가까울까? 정말 독서가 돈과 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일까. 독서가 사람도 변하게 할까? 교양도 가져다줄까? 어렸을 적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교훈대로 책을 많이 읽으면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까?

이러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머리와 마음속에서 파리처럼 윙윙거리며 떨쳐버릴 수 없다면 샤를 단치(Charles Dantzig)의 『왜 책을 읽는가(Pourquoi lire?)』를 읽어 보자. 독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긴 이 책을 통해 독서에 대한 뿌리 깊은 환상도 깨지지만 공평하게 독서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과 불신도 날려버리게 될 것이다.

독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를 단치의 부모는 저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굳이 글자를 깨우쳐주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샤를 단치는 어렸을 때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 높은 독서광이 되었다. 너무 책에만 매달려 지내는 저자를 걱정하는 부모의 기분을 맞춰 드리려고 일부러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을 정도라니 정말 영재가 따로 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 쌓인 독서의 힘은 이 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나칠 정도로 지적인 저자의 수준 높은 독서 담론에는 수도원의 오래된 고서에서나 맡음 직한 퀴퀴한 곰팡내가 난다. 그렇다고 격식을 지나치게 차린다거나 특별히 경건하지도 않다. 오히려 날카롭고 직설적인 그의 필치는 경쾌하며 자유분방하다. 때론 뜻대로 그림이 안 그려지는 성난 화가가 마구 붓을 휘두르듯, 연약하지만 부드러운 종이에 두 눈에 광채를 뿜어대며 마구 글씨를 휘갈기는 광기 어린 저자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기도 한다.

독서광이니만큼 독서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 찰 거라고 미리 짐작했다간 나처럼 뒤로 벌렁 자빠질 수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샤를 단치는 독서는 사람을 거의 변화시킬 수 없으며 교양 있는 사람으로도 만들 수도 없다고 말한다. 참말로 놀랍게 들릴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리뷰를 쓰고 있는 나를 보더라도 대한민국 성인의 평균 독서량보다는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처음 도서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원래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범인이었는데, 책과 역사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 오히려 사람을 괜히 미워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워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인간적인 감정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듯, 그것은 아직 인간성은 남아 있다는 방증이다.

독서를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리가 독서를 하는 진짜 이유에 대해 샤를 단치는 독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만족적인 이기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그것은 리뷰 앞부분에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내가 주절주절 늘어놓은 대답들만 봐도 무난하게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관심을 좀 더 끌고 더 나아가 사랑받기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독서의 좋은 영향에 대한 환상과 나쁜 영향에 대한 쓸데없는 기우를 밝히면서 샤를 단치는 좀 더 자세하게 왜 책을 읽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고, 편견을 없애며,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왜 책을 읽는가?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편견 속에 살면서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무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니, 이 얼마나 오만하면서도 명쾌한 비유인가. 그러나 독서는 결국 이타심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과 독서, 문학에 대한 기존 관념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독서의 가치를 지키는, 종이책의 가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자처한다. 종이책의 가치가 벼랑 끝에 선, ‘책’의 전환이 이루어지려는 변혁의 시대에 숨을 쉬듯 책을 읽으면서 죽음과 경주하는 저자는 오래전 책으로 사용했던 양피지 두루마리와 대나무 등이 사라졌듯이 전자책으로 말미암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종이책이 없는 세상에 닥칠 위험을 경고한다. 정보화된 미래는 권력자들에게 더 충실히 봉사할 것이고, 그럴수록 인류의 정신은 더욱 조그만 상자 안에 갇힐 것이라고.

인류의 무궁한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과 변덕스러운 감정을 가장 잘 간직한 물리적인 매개체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책이라면, 종이는 무궁하고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의 마음과 친숙하게 이어주는 가장 친근한 매개체였다고 볼 수 있다. 전자책으로도 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뭔지 모를 그 낯섦은 여전히 종이책을 찾게 만든다.

마치면서...

랑스에 가본 적도 없고 프랑스어는 ‘봉쥬르’와 ‘마담’ 정도밖에 모르며 그렇다고 특별히 프랑스 문학이나 역사를 깊이 있게 읽어 본 적도 없는 나지만, 『왜 책을 읽는가(Pourquoi lire?)』는 왠지 프랑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을 프랑스적인 것, 프랑스 문학으로 사색의 정원을 꾸민 이 책에는 보편적인 애국심과는 질과 격이 다른 자부심이 넘쳐 흐른다. 파벌을 형성하고 제자들의 연구를 가로채는 프랑스 대학의 교수들과 다분히 의도적으로 글을 쓰는 졸렬한 작가들을 통렬하게 비판한 부분은 충분히 공감이 가고 시원스럽지만, 작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오만함과 자신의 신념에 대한 강한 확신은 갑자기 찌릿한 오줌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그래서 때론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며 반감이 일어서기도 한다.

그러나 시체 썩는 냄새 같은 견디기 어려운 악취가 아닌 이상 다행스럽게도 사람의 코는 웬만한 냄새에는 금세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오만과 확신의 악취가 사라지면 그제야 자연스럽게 저자 샤를 단치의 놀라운 통찰력과 깊고 넓은 지식으로 곰탕처럼 걸쭉하게 우려낸 독서에 대한 고찰이 머릿속으로 스멀스멀 조금씩 기어들어 오기 시작한다.

이 리뷰는 2016년 1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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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24.

[책 리뷰] '귀족처럼 행동하는 반항아' ~ 아르센 뤼팽 전집 1(모리스 르블랑)

Arsene Lupine Gentleman-Burglar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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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처럼 행동하는 반항아'

Original Title: Arsène Lupin Gentleman-Cambrioleur by Maurice Leblanc
아르센 뤼팽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 반지는 조르주 드반의 것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옳습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요. 아르센 뤼팽은 아르센 뤼팽일 뿐이고 아르센 뤼팽밖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르센 뤼팽과 당신 사이에는 추억이란 있을 수 없지요…….용서해 주십시오. 당신 옆에 있는 제 존재 자체가 당신에 대한 모욕이란 걸 알았어야 했는데……」 (『아르센 뤼팽 전집 1』, p242)

교 성적은 우수했던 모리스 르블랑(Maurice Leblanc)이었지만 뤼팽 시리즈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일반 대중에게 그렇게 알려진 소설가는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에 《주 세 뚜》라는 잡지를 막 창간했던 출판업자 피에르 라피트가, 영국의 셜록 홈스와 래플스에 맞먹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탐정 소설을 써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탄생한 주인공이 바로 ‘아르센 뤼팽’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07년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Arsène Lupin Gentleman-Cambrioleur)』이라는 제목으로 9편의 단편과 함께 ‘아르센 뤼팽’은 대중 앞에 첫선을 보였다.

작품은 9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 단편과 마지막 단편은 뤼팽의 이루지 못한 씁쓸한 사랑의 여운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 두 단편에 등장하는 뤼팽이 사모하는 여주인공은 대서양 횡단 여객선에서 처음으로 만난 부유한 상속녀이자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인 넬리다. 그녀는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에서 뤼팽이 가니마르 형사에게 덜미가 잡혔을 때 저랜드 여사에게서 훔친 보석들이 숨겨진 뤼팽의 코닥 카메라를 경찰에게 넘겨주지 않고 바다에 던져 증거를 없애면서 뤼팽에 대한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음을 은연중에 표시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다가 이 작품 마지막 단편에 깜짝 등장하면서 뤼팽의 연정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꽤 시간이 흘러 그녀는 「한 발 늦은 헐록 숌즈」에서 기인한 인연으로 뤼팽을 다시 만나지만, 그 장소와 시간은 공교롭게도 뤼팽의 범죄 현장이었다. 대서양 횡단 여객선에서는 막연한 상상에 머물렀던 뤼팽과 범죄의 연관성이 이번에야말로 딱 맞아떨어진 격이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천하의 괴도 신사 뤼팽도 이때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훔친 물건을 내일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구차하게 변명을 해보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뤼팽의 어느 한 손가락만을 응시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시선이 가리킨 뤼팽의 손가락에는 어느새 드반에게서 훔친 반지가 보란 듯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뤼팽은, “당신이 옳습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요. 아르센 뤼팽은 아르센 뤼팽일 뿐이고 아르센 뤼팽밖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르센 뤼팽과 당신 사이에는 추억이란 있을 수 없지요…….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 옆에 있는 제 존재 자체가 당신에 대한 모욕이란 걸 알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며 체념의 쓴웃음을 짖는다. 넬리는 역시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나고 뤼팽은 그 옛날 뉴욕 항구에서처럼 그저 눈길로만 그녀를 배웅하는데 만족한다. 그런데 넬리가 기대어 있던 대나무 화분 위에 장미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훗날 두 사람의 또 다른 인연을 예고하는 것일까?

또 다른 단편 「여왕의 목걸이」는 어린 뤼팽의 활약(?)을 그린 이야기로써 뤼팽의 전체 활약 중에서 아마도 최초의 사건이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어머니를 걱정하는 뤼팽의 지극한 효성을 엿볼 수 있다.

팽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나무랄 곳 없는 완벽한 ‘변신’이다. 이 작품에서만도 뤼팽의 기본 골격인 대담무쌍한 대도(大盜)에서부터 셜록 홈스 뺨치는 사건 해결력을 보이는 탐정, 곧 쓰러질 것 같은 부랑자, 맞수인 가니마르 형사, 평범한 여행객 등 그의 변신은 정말 자유자재이다. 또한, 그의 변신은 외모뿐만 아니라 변신한 역할에 어울리는 언행까지 완벽하게 구현함으로써 적수인 가니마르 형사조차 멋지게 속아 넘긴다. 이러한 탁월한 변신 솜씨에 재치있는 말솜씨와 쾌활함, 천재적인 계략, 신비로운 삶, 그리고 변함없는 뤼팽의 상징인 실크해트, 망토, 외알박이 안경 등 거만하면서도 절대 지나치거나 선을 넘지 않는 뤼팽의 절도 있는 모습과 언행은 세계의 수많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야말로 작품 「서문」에 적힌 대로 뤼팽은 “반항아처럼 행동하는 귀족이 아니라 귀족처럼 행동하는 반항아이다.”

이 리뷰는 2016년 1월 2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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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20.

간단한 벤치마크를 곁들인 Windows Server 2012 R2 짤막한 사용기

구입할 때도 그렇게 좋은 성능은 아니었지만, 잡다한 일을 하는 데는 아직 지장이 없는, 더군다나 기특하게 지금까지 잔고장 한 번 나지 않고, 그래서 벌써 4년째 쓰는 정든 노트북에 윈도우 서버 2012 R2를 설치하고, 실제 사용 환경에서 좀 써보다가 벤치마크 프로그램인 PCMark 7을 돌려본 결과를 기존 벤치마크와 비교해 보았다. 클린 설치가 아닌 사용자 입맛대로 윈도우를 설정하고 프로그램도 이것저것 설치한 실제 사용 환경이다.

윈도우 8.1은 윈도우 8 시절 메모리 누수 문제 때문에 사용을 하지 않았었는데, Windows Server 2012 R2의 선전을 보니 내 노트북 세대(트리니티 APU)는 윈도우 8.1이 가장 잘 맞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AMD는 자사의 APU를 윈도우 8.1에 최적화시켰다고 발표했었는데 그 말이 맞긴 맞나 보다.

이 리뷰는 2016년 1월 20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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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8.

Windows 8.1 또는 Windows Server 2012에서 게임 실행할 때 DirectX 8.1 요구

윈도우 8.1 또는 서버 2012(Windows Server 2012)에서 GTA3 같은 오래된 게임을 실행하면 DirectX 8.1을 요구하며 실행이 안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제어판의 [프로그램 및 기능]의 [Windows 기능/켜기] 중에서 DirectPlay를 설치해주면 된다.

스샷은 서버 2012 R2의 서버 관리자에서 DirectPlay 기능을 추가한 모습이다.

이 리뷰는 2016년 1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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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사회제도로서 혼인이 가지는 의미와 그 기원 ~ 인류혼인사

Short History of Human Marriage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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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제도로서 혼인이 가지는 의미와 그 기원

Original Title: Short History of Human Marriage by Edward Westermarck
합의(合意)에 의하여 체결된 계약(契約)이라면 그것은 합의에 의하여 해소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혼인사(Short History of Human Marriage)』, p354)

책은 사회학자 E. A. 웨스터마크(Edward Westermarck)의 『인류혼인사(Short History of Human Marriage, 1926)』 제5판을 발췌한 책으로 하나의 사회제도로서의 혼인을, 즉 사회제도로서 혼인이 가지는 의미와 그 기원, 여러 혼인 방식과 그 형태, 여러 민족의 다양한 혼인 의식과 그것이 지니는 다양한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인이 해소(解消)되는 이혼을 다루고 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쓰인 혼인에 대한 개괄서이지만, 인류의 역사시대보다 더 오랫동안 유지된 것으로 보이는 혼인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 사람이 결혼하건 하지 않건 누구도 간과할 수 없는 인생의 중요 문제 중 하나다. 원시 시대의 혼인이 성적 욕구 해결과 종족 번식을 위한 자연적인 해결책으로써 중요시되었다면, 문명이 발달한 지금의 혼인은 경제, 문화, 때론 정치적으로까지 확장되는 다층적인 영향력을 가짐으로써 더욱 다양한 의의가 포함된다.

그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고대 여러 민족부터 내려오는 각양각색의 혼인 풍습이 한국의 전통적인 혼인 풍속과 상당 부분 일치하거나 비슷하다는 점이다. 일례로 지금은 사라진 조혼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나 힌두인에게는 보편화하여 있었고, 가족 중에서 연장자가 연하자보다 먼저 혼인해야 한다는 것을 중시하던 관습은 중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웨일스 및 스코틀랜드에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중국이나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 혼인하는 이유 중 하나였던 조상 숭배를 이어가는 것 역시 고대의 아리아계나 인도에서도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이었다고 하니, 이들로부터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혼인 제도에 남아 있는 듯하다.

인 의식도 서로 다른 민족들 간의 유사한 점이 많으며 이러한 의식 중에서 우리의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있다. 일례로 혼인 절차 중 빠질 수 없는 잔치가 있다. 이것은 법적으로 혼인 계약의 정당성을 공인받을 수 없었던 시기에 잔치를 통해 주변에 널리 알림으로써 혼인 계약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때론 부를 과시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 밖에 다양한 혼인 의식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 결혼 전 약혼반지 의식은 매매혼의 흔적으로 보기도 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표적인 혼인 의식 중 하나인 혼인 의식 전후 예물을 주고받는 것은 구매혼을 완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로 비추어보면 우리의 ‘함들이기’ 역시 구매혼의 다른 표현, 혹은 그 변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로코 북부 지방에서 행해졌던 신부를 상자에 가둬 새로운 가정으로 옮겨가는 것은 외부로의 사악한 힘으로부터 지키려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한국에서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가는 것을 연상시킨다. 가마를 타고 가는 것에는 단지 이동의 편리함이라던가, 또는 낯선 곳으로 시집가는 처녀의 수줍음을 위한 배려의 의미도 깃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지방을 통과할 때 신랑이 신부를 번쩍 들어 안고 넘기는 것은 널리 유포된 관행이며, 고대 인도에서는 신부로 하여금 문지방 위를 밟는 것만을 피하도록 했다고 한다. 문지방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는 미신은 그 유래가 이렇듯 상당히 오래되었다.

더불어 저자 웨스터마크는 집필 당시의 혼인 감소 경향에 대하여도 분석하면서, 그 원인으로 높아져 가는 여자의 경제적 지위를 거론한다. 교육의 확대와 새로운 발명과 발견, 부의 증대로 남녀의 취미가 폭넓어지고 욕구가 다양화되면서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활상의 즐거움을 능력껏 충분히 맛볼 수 있게 된 남녀에게 혼인 생활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도 혼인 감소의 원인으로 꼽는다. 또한, 사회 전체에 우수한 문화가 보급된 것도 남녀의 눈높이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져 결국 서로의 이상향을 찾거나 서로의 이상을 충족시켜 주는데 어려움을 갖게 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웨스터마크의 분석은 현대인의 결혼 관념에 대해서도 상당한 시사를 줄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이다.

마지막으로 웨스터마크는 이혼이 혼인의 적이며 만일 이혼을 쉽게 할 수 있게 된다면 가족제도 자체를 파괴할 것이라는 기존의 관념에 반대하며, 혼인이 합의에 따라 체결된 계약이라면 그것은 합의에 따라 해소될 수 있어야 한다며 이혼을 지지한다. 이혼은 불행한 혼인에 대한 필요한 구제수단이며, 혼인의 영예로움을 더럽히는 결합을 종결시킴으로써 혼인의 위엄을 보존시키는 수단이라는 것이 웨스터마크가 이혼을 지지하는 이유이다.

래 『인류혼인사(Short History of Human Marriage)』는 총 3권이며 이를 다 합하면 1,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이다. 그중 사회제도로서 혼인이 가지는 의미에 관한 내용을 한 권으로 축약한 것이 이 책인데, 그로 말미암아 교과서처럼 사실만을 늘어놓은 좀 딱딱한 부분도 있고, 내용상으로도 뭔가 부족하거나 허전하게 느껴지는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한국어 번역서 중 인류의 공통 관심사인 혼인의 역사에 이만큼 개괄한 책도 없을 것 같다.

현재 지구의 인류는 세계화 덕분에 각 민족 간 문화적 경계의 날카로움은 무뎌지긴 했지만, 여전히 서로 다른 민족이나 나라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할 수 있는 문화적 장벽이나 민족적 특색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전해 온 혼인 풍속의 많은 부분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서로 다른 민족 사이에서 유사한 점을 보여주는 것은 여러 민족의 갈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줄기로 합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은 지금의 서로 다른 민족이라는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며, 지구에 사는 우리는 하나의 인류, 하나의 종이라는 숨길 수 없는 진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이것은 현재 서로 다른 민족 간의 문화적 차이를 단지 배타적으로만 보지 말고, 장미꽃과 무궁화가 서로 다르지만, 각각 나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처럼 서로의 ‘차이’와 ‘서로 다름’의 미학을 너그럽게 인정하여 ‘더불어 사는 지구’로 나아갔으면 하는 큰 이상을 품게 한다.

이 리뷰는 2016년 01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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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2.

[책 리뷰] 영혼의 울림이 느껴지는 노래 ~ 청춘의 노래들(최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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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울림이 느껴지는 노래

노래는 거의 사진과 같다. 오래전에 찍었던 사진처럼, 그 노래를 들으면 당시의 풍경과 사람과 감정이 다시 선명하게 인화되어 나온다. (『청춘의 노래들』, 9쪽)

‘페이퍼레코드’ 레이블 대표 최성철이 쓴 『청춘의 노래들』에는 ‘어두운 시대의 예술혼’, ‘연민, 저항 그리고 탐미’, ‘상실의 시대를 품다’, ‘K-Pop의 미래를 부른 노래’ 등 총 4부에 걸쳐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가요의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음악가들이 소개되어 있다. 암울한 시대를 담담하게 노래하거나 당당하게 시대에 맞선 음악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표현하기에 몰두했던 음악가, 대중적이고 서정적인 발라드로 팬들의 심금을 울리던 음악가 등 이들이 지향하던 음악 세계는 얼핏 들여다보면 노래를 부르는 목적이나 노래를 듣는 팬들의 성향도 저마다 다르고 음악적 장르와 특색 역시 제각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점에도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노래를 듣는 사람의 영혼을 털실 타래처럼 부드럽고 따스하면서도 하나로 묶어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찡한 ‘울림’이다.

『청춘의 노래들: 80~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마스터피스』에서 다루는 1980, 1990년대의 흘러간 옛 노래에 내 세대, 혹은 그 전후 세대가 유난히 집착하거나 애착이 가는 것은 단순히 옛것에 대한 향수 때문도, 다사다난했던 청춘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했다는 동지애에서 비롯한 것만도 아니다. 그때 그 노래에는 지금의 노래에서는 결코 느끼거나 맛볼 수 없는 바로 그 ‘울림’이 있었다. 바로 은은하면서도 강렬하게 전해져오는 영혼의 ‘울림’말이다.

‘울림’을 통해 가수와 청중이 서로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었든 그 시절에는 그 ‘울림’ 하나 때문에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것인 동시에 듣는 사람의 것도 되었다. 말 그대로 그들, 아니 우리 모두의 노래였다. 그랬기 때문에 문신도 없앨 수 있다는 레이저 시술로도 지울 수 없는 투명하면서도 뚜렷한 문신을 듣는 사람의 영혼 속에 아로새겨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비 오는 날 허리와 무릎이 쑤시듯, 잊을만하면 그 노래들이 기억 속에 떠오른다. 폭우와 홍수가 물속을 헤집어 각종 부유물을 표면으로 밀어올리듯,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시대를 살수록 청춘의 노래는 우리의 마음속을 바쁘게 떠다닌다.

『청춘의 노래들』은 한국 가요의 르네상스 시기와 일치한다. 그런데 이 책을 곰곰이 읽다 보면 그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간절한, 때론 절박한 심정으로 노래를 불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요즘의 기업처럼 운영되는 기획사에 의해 발탁된 애초에 인기나 금전을 목적으로 공장에서 제품을 마구 찍어내듯 생산하는 인스턴트 식품 같은 가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음악에 대한 부단한 열정과 의지만으로 스스로 일구어낸 진짜 가수였다. 故 김현식은 자신의 목숨이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불태웠을 만큼 노래를 부르고 싶어했다. 또한, 그는 김종진에게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노래하면 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들은 누군가와 경쟁하고자, 또는 순위를 매기고자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들에겐 육체를 쥐어짜 내는 안쓰러운 소리가 아니라 영혼을 메어치려 나오는 찡하고 잔잔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한마디로 그들의 노래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와 다름없었고, 『청춘의 노래들』은 애틋하면서도 따사로운 그 숨결의 존재를 깨우쳐주는 조언자이자 그 숨결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이어주는 인연이다. 이로써 나는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더불어 나 자신도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음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었다. 낡은 앨범에 외로이 잠자고 있던 빛바랜 사진을 꺼내보며 감회와 추억에 잠겨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듯, 간만에 꺼내 들은 그들의 ‘울림’에 전율하며 울보처럼 흘러내렸던 뜨거운 그 눈물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노래들과 함께 청춘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내가 그랬듯, 저자 최성철의 마법 주문 같은 글에 매혹되고 그들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곁들인다면 숨 가쁜 생활 속에서 잊을 수밖에 없었던, 어쩌면 잊도록 강요당했던 청춘 시절로 돌아가는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 또한, 이 책 속에 소개된 음악가들을 생전 처음 접한다고 해서 실망할 것은 없다. 아직 젊고 싱싱하며, 그래서 더더욱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호기심 왕성한 그들에겐 또 다른 기적이 준비되어 있다. 바로 찬란하고 꿋꿋하게 일어섰던 한국 가요의 르네상스를 탐험하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청춘의 노래들』 덕분에 실로 간만에 옛 학창시절을 떠올리는 풋풋한 추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무릇 대단한 것이 숨겨진 것도 아닐 터인데 한 번 묻힌 과거는 무덤 속에 파묻힌 관처럼 쉽게 들여다볼 수가 없다. 그것은 추억, 혹은 과거가 항상 좋은 기억이나 흐뭇한 감정만 떠올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청춘이 남긴 조각 하나하나는 너무나 소중한 추억들이다. 청춘의 노래는 기억 속에 파묻힌 그 추억의 조각들을 되찾아 재생시켜주는 만능플레이어이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늘고 질긴 연줄이다. 청춘의 노래는 쓰리고 아프거나 한스럽고 울분을 자아내는, 결코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조차 연인의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처럼 보듬어 주면서 격해지지 않도록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이로써 추억의 조각들을 긁어모아 퍼즐을 완성하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은 깔끔하게 제거된다.

황폐하고 위압적인 도시에서 경쟁적인 피곤한 삶에 지친 우리를 근근이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며 도피처 중 가장 만만한 것은 각자가 간직한 추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으로 안내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최성절의 『청춘의 노래들』이다. 그 노래가 꼭 『청춘의 노래들』에서 소개하는 노래들일 필요는 없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노래들만큼 옛 추억을 자극하고 처연히 회상에 잠기게 하는 노래들도 없다. 이 마지막 맺음말을 쓰는 지금 듣는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복고 경향이 상업주의의 또 다른 상술이라는 비판이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다양한 욕구만큼이나 음악적 취향 역시 제각각이고 새로운 것을 찾음에도 현재의 대중음악이 그 갈증을 해결해줄 수 없다면 과거나 다른 나라의 음악에서 그 고상한 갈증을 풀 수밖에 없다. 또한, 좋은 책은 ‘고전’이라 불리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두루 읽힌다. 음악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아마도 최성철 대표는 10, 20년이 지나 들어도 처음 들었을 때 그 느낌 그대로 전해주는 음악을 소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인스턴트 식품처럼 한 번 듣고 버리는 음악이 아니라 말이다.

이 리뷰는 2016년 01월 12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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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6.

[책 리뷰] 평범함의 위대함’ 깨달은 순간 그는 이미 ~ 시골선생(다야마 가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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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의 위대함’ 깨달은 순간 그는 이미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Original Title: 田舎教師 by 田山 花袋
그는 그저 공명심에 사로잡혀 열심히 공부하는 구마가야나 교다의 친구들과 이런 고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비교해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지상에 오르는 훌륭한 사람들의 인생도 그려보았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멋지게 살고 싶다. 그러나 평범하게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집안의 행복 一 허약한 어머니의 행복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명예를 좇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은 평범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시골선생(田舎教師)』 p194)

신이 처한 환경 때문에 이상과 사랑까지도 좌절되면서 통한의 세월을 보내던 세이조는 어느 날 문득 체념으로부터 오는 평범한 삶이 주는 평온함을 깨닫는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멋지게 살고 싶다. 그러나 평범하게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집안의 행복 一 허약한 어머니의 행복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명예를 좇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은 평범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시골선생(田舎教師)』, p194)

다야마 가타이(田山 花袋)의 『시골선생(田舎教師)』 에 등장하는 시골 소학교 선생 세이조는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단 한 문학청년의 이야기로써 저자는 청년이 남긴 일기와 원고를 읽고 그에게 공감하여 이 작품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현대의 젊은이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는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서 세이조처럼 출세나 성공, 또는 세상을 바꿔보려는 포부나 이상 등 한 번쯤은 원대한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막상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 실제 삶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루하루가 숨 막히는 경쟁 속에서 냉정한 현실을 절감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삶에 물들고 철이 들면서 ‘이상’과 ‘현실’의 현격한 차이를 깨닫는 순간 이상은 공상 속의 한낱 꿈으로 희석되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아예 기억 속에서 잊힌다. 모두가 학창 시절에 꿈꾸던 대로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마음먹은 대로 성공하는 것도 아닌 엄연한 현실 앞에서 그동안 품어왔던 꿈과 이상을 체념하고 적절한 선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자신의 삶을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미덕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럴듯한 차를 몰며 그럴듯한 집에서 살고 그럴듯한 직장에 다니는 잘 생기고 예쁜 선남선녀들이 나오는 드라마에 현혹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못다 한 꿈, 못 이룬 이상과 사랑, 그리고 성공이 그 한 폭의 화면 속에서는 고스란히 보란 듯 현실처럼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어떠한 식으로도 메우지 못하면 그것만으로도 세이조처럼 청춘의 번뇌는 시작된다. 자신이 오랜 시간 꿈꿔왔던 모든 것을 기약도 없이 먼 훗날로 미룬 채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또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에 절박하게 매달려야 한다는 것은 한창 꿈과 이상을 향해 열정을 불태울 청년에게는 어쩌면 굴욕일지도 모르며 그래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골선생』의 청년 세이조를 통해서도 잘 묘사되고 있다.

세이조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하고 허탈감에 빠진다. 넉넉한 집안 형편 때문에 도시로 진학한 친구들을 질투하고 시샘하기도 한다. 평생 시골선생으로 썩을 것 같은 두려움에 어떻게든 시골을 벗어나고 싶은 세이조는 붓을 들어보기도 하고 음악에도 손을 대보지만, 체계적으로 문학과 음악을 배우지 못한 그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시골 학교에 있는 풍금으로 연습한 실력으로 전문음악학교에 진학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명확하게 보여주며 더불어 세이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지식의 한계도 보여준다.

그러나 세이조는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서 차츰 시골선생으로서의 보람과 시골 생활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화창하고 따뜻한 날에는 들판과 둑으로 나가 한적하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아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학생들이 ‘선생님, 선생님’ 부르며 강아지 새끼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세이조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신기해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것도 좋았다. 수업 중 음악 시간이 제일 재미있고 즐거웠으며, 마을 주민들의 관심도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따분하고 평온할 것만 같았던 평범하게만 보이는 시골에서도 도시처럼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마을 잔치가 있는 날이면 도시 못지않게 사람들이 들끓고 시끌벅적했다.

이런 심경의 변화는 동창생 오규를 대하는 세이조의 마음에서도 드러난다. 오규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체국에 취직해서 불평불만 없이 태평하게 살아가는, 학창시절에는 세이조와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던 친구다. 세이조는 부임한 학교와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점 때문에 오규와 가깝게 지내면서도 즐거움도 취미도 없이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오규를 세이조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다. 단지 정이 많고 친절한 친구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평범함의 위대함’을 깨달은 세이조에게 오규야말로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이다.

어째서 이 친구에게는 야심이 없는 걸까. 어떻게 그런 보통의 평범한 세상 속에 안주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나와는 종류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일기에 “오규는 내가 아끼는 친구다. 이해타산이나 도덕성을 따져서 친구 사이를 깨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또한 “예전에 이 친구를 평범하다고 본 것은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아직 미숙했던 탓이다. 오규에 비하면 나는 세상물정도 많이 모르고 인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오바타나 이쿠지와 이 친구를 비교해보니, 지금 처음으로 평범함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라고 썼다. (『시골선생(田舎教師)』, p286~287)

어쩌면 명예와 출세를 쫓는 삶이야말로 평범한 삶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명예와 출세는 대부분의 사람이 바라는 바이니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다. 세이조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도 포기하고 건강 문제로 군대에도 지원하지 못해 의기소침하고 아쉬워하지만, 그는 끝까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만은 잃지 않는다. 그동안 청운의 꿈을 향해 불태웠던 그 뜨거운 열정으로 자신을 한 줌의 재로 남을 때까지 효심으로 태워버린다. 그가 이처럼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골에 남아서 끝까지 효를 다하려고 노력하는 애처로우면서도 갸륵한 모습이야말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세이조가 명예와 출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그래서 ‘평범함의 위대함’ 깨달았던 순간 이미 그는 평범한 사람을 넘어선 것이다.

사람의 성격이나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 어느 사람의 삶도 서로 같은 것은 없으며 나름의 사연과 우여곡절을 가진다. 단지 그 곡절이 가지는 굴곡의 높낮이가 조금은 평탄해 보인다고 해서 ‘평범’이라는 잣대를 인생에까지 들이대는 것은 개개인에게는 너무 억울한 일이다. 얼핏 보면 평탄해 보이는 굴곡일지라도 막상 가까이 다가가 보면 멀리서는 볼 수 없었던 생을 마감하는 노인네의 이맛살에 깊이 새겨진 주름 같은 무수한 상처가 있을 수도 있으며, 그 굴곡을 일으킨 주인 또한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룬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느끼는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이지 않을까? 그래서 ‘평범함의 위대함’이란 다름 아닌 내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시골선생』에는 청운의 이상을 품은 청년이 만만치 않은 세상 물정에 부딪히고 어려운 환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신의 꿈이 물거품처럼 좌절되면서 느끼는 허탈감, 그리고 나름의 조그만 사회를 형성한 시골의 삶과 선생 일에 조금씩 적응해가면서 느끼는 삶의 의미와 소소한 행복을 통해 ‘명예와 출세’에 대한 집착을 체념함으로써 얻게 된 평범한 삶이 가져다주는 평온함을 깨닫기까지의 청춘의 고뇌로 가득한 짧지 않은 여로가 담겨 있다. 다야마 가타이는 이를 마치 지나가던 여행객이 잠시 마을에서 머무르고 남긴 수기처럼 인물과 사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관조하는 담담한 태도로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은 이야기의 흐름 주변을 풍성하게 메우는 목가적인 시골 풍경이다. 계절마다, 때로는 달마다 시시각각 변화는 농촌의 들판과 강둑, 그리고 산의 풍경과 농촌의 일상을 수려하지는 않지만 치우침 없이 부족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세이조가 음악에 실패하고 나서 관심을 두게 된 꽃과 나무 등 다양한 식물과 꽃이 피고 지는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표현한 부분이 눈에 띄게 많은 것도 특징이다.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목가적인 전원생활과 그 배경을 이루는 들판과 강둑, 강과 산에 대한 풍부한 묘사는 잠시 눈의 피로를 풀고자 두 눈을 감을라치면 그 빛과 어둠의 혼돈 속으로 아물아물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곳엔 어렸을 때 방학이면 연례행사처럼 빠짐없이 놀러 가곤 했던 외할머니가 계셨던 시골처럼, 언제 어느 땐가 꼭 한 번쯤 가본 듯 느껴지게 하는 정겹고 따뜻함이 물씬 스며들어 있다. 자연주의 문학의 묘미를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이 리뷰는 2016년 1월 6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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