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8

문화를 넘어서 | 문화의 속박과 연장의 전이

Beyond Culture book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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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넘어서 | 에드워드 홀 | 인류를 위협하는 문화의 속박과 연장의 전이

Original Title: Beyond Culture by Edward T. Hall
유럽인과 미국인 모두 물질세계에 관한 지식과 현란한 기술의 성공에 가려져 자신들의 복잡한 생활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들과 동일한 수준까지 기계적 연장물을 진화시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그릇된 우월감을 과시한다. (『문화를 넘어서(Beyond Culture, 1976)』, p295)

인문과 과학, 그리고 종교를 포함한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름 아닌 인류의 번영과 지구의 평화다. 그러나 지나친 영양분 섭취가 비만과 각종 질병을 일으키듯 인류의 지나친 번영과 발전이 인구 과잉과 기후 변화 등을 불러오면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미묘하고 치명적인 또 하나의 위기는 인간이 자신이 만든 연장물(extension), 제도, 관념 등과 맺는 관계 속에, 또한 지구상에 거주하는 수많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속에 내재한다고 말한다. 정치와 권력은 이러한 위기를 조장할 뿐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그럴 의지도 없을뿐더러 이러한 위기 이면에는 분명히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 에드워드 홀은 정치와 권력마저 지배하는 그 무언가는 바로 문화라고 말한다.

그는 문화는 개인의 정신형성을 지배함으로써 사람들이 사물을 바라보고,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결정을 내리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생활을 엮어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고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문화는 자신의 관점이 전 세계의 공통되는 것인 양 착각하게 하여 문화적 충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다른 문화와 접촉하여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문화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의 속박조차 느끼지 못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지배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사람은 자신의 연장물, 특히 언어, 도구, 제도 등을 발전시키기 시작하면서 ‘연장의 전이’(extension transference )라고 에드워드 홀이 명명한 그물에 걸려들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은 판단에 오류를 범하고 자신을 소외시키게 되며 스스로 창조한 괴물을 통제할 능력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은 스스로 연장시켜온 자신의 일부를 대가로 지불하고 진보해왔으며, 그 결과 사람의 본성은 다양한 형태로 억압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현재 인류에 만연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들을 사람이 발명한 수많은 연장물과 연관시킨 에드워드 홀은 사람이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상실되고 소외된 본연의 자아를 다시 찾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Beyond Culture by Edward T. Hall

이러한 문제점들, 즉 문화의 보이지 않는 속박과 ‘연장의 전이’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오늘날의 사람으로 발달하게 되었는지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이 『잊혀진 인류의 조상』을 집필한 목적처럼 에드워드 홀 역시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구원을 인류의 과거에서 찾고 있다. 전문분야는 다르지만, 이들이 인류를 염려하는 지극한 마음은 이처럼 일맥상통하고 있으니 진정한 학문의 이치를 파고드는 진짜 학자들이다.

보이지 않는 문화의 속박과 연장의 전이는 교육 시스템도 벗어날 수 없다. 에드워드 홀은 미국의 교육 패턴은 고도로 논리정연하고 수리능력이 탁월한 학생들만이 큰 혜택을 받게 되어 있으므로 그 결과 두뇌와 재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 특별한 재능이 교육제도와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좌절을 맛보거나 무리하게 노력하다가 배제되는 학생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자신의 타고난 재능이 단지 사회와 문화의 부응에 맞지 않는 이유로 좌절하고 실의에 빠진 학생은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서로 다른 외모만큼이나 각기 다양한 성정과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현대의 교육은 체에 밭치듯 획일적으로 사람을 걸러내고 있다. 이것은 미국, 한국의 교육 환경뿐만 아니라 문명의 세계에서 ‘영혼도, 기억도, 양심도’ 존재하지 않는 관료제 교육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단점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다양성은 누누이 지적되고 강조돼왔음에도 현실은 그 다양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어릴 적 교육 단계에서부터 그것을 억누르고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앞날이 좌절된 학생들이 느끼는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비단 교육뿐만 아니라 문화의 속박과 연장의 전이의 다른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인원은 다른 동물보다 놀이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집착하고 그러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치기 때문에 유아기 때는 가장 활발하게 노는 것이 가장 최고의 학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파트를 비롯한 한국의 대부분 집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놀이를 허용하면 이웃들은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집에서조차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한쪽에서는 놀이 본능을 억제해야 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 놀이 본능으로 말미암은 소음과 진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놀이를 제외하고라도 도시에 사는 사람 중에서 다른 사람의 불필요한 간섭 없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을 가진 사람은 대한민국 상위 몇 퍼센트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려고 지은 사람을 위한 집이 거꾸로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가. 집뿐만 아니라 포장된 도로 위라면 자전거와 오토바이, 자동차, 전동킥보드 등 바퀴 달린 괴물들이 판을 치는 한국에선 내 집 앞에서조차 마음 놓고 걸어 다닐 수 없고 아이들도 내 집 앞에서조차 마음 놓고 놀 수 없다. 한국 도시는 사람보다 자동차가 우선인, ‘연장의 전이’의 대표적인 폐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는다.

에드워드 홀은 『문화를 넘어서(Beyond Culture, 1976)』를 통해 문화적 속박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은 없으며 단순히 부분적으로 개별적인 내용에 입각한 이해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의 비약적인 발달과 함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문화제도가 붕괴하는 요즘 지역과 민족들을 지배해 왔던 세계 곳곳의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충돌하며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쉽고 간단한 일을 아닐지라도 우리가 만든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이 만든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 리뷰는 2015년 12월 18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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