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 아름다움과 칼 속에 숨은 이중성을 파헤치다
Original Title: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by Ruth Fulton Benedict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고 나서인 1942년 전쟁공보청에 들어간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유럽과 아시아 문화에 관한 논문을 쓰는 일을 맡게 되면서 우방국가, 적성국가, 적국에 의해 점령된 국가 등 전시 미국과 관련이 있는 나라들의 문화에 관해 연구했는데, 그 결과물인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1946년)』은 서양인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본의 전시 수행 방식을 이해하고자 일본의 문화와 국민의 보편적 특성을 연구한 책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원격 문화 연구 기법으로 다양한 문학적 자료들 - 역사, 기행문, 연극, 소설, 영화, 인터뷰, 일본군 병사들의 일기 – 등을 이용해 현지 조사를 중요시해온 인류학자의 관례를 뒤집으면서 매우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을 완성했다.
이 연구를 통해 베네딕트는 일본인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것은 바로 책의 제목 『국화와 칼』에서 언뜻 내비치듯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를 가꾸는 데 신비로운 기술을 가진 국민이면서 동시에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린다는 ‘이중성’이다. 이 이중성은 베네딕트가 여러 자료를 통해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한 일본의 보편적 특성이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이중적인 언행의 배후,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의 주요인으로 각자 알맞은 위치에서 기리(義理)와 기무(義務)를 충실히 이행하려는 일본 특유의 문화를 거론한다. 기무가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면, 세상에 대한 기리는 계약관계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리는 법률상의 가족에 대한 일체의 의무를 포함하고, 기무는 직계 가족에 대한 일체의 의무를 포함한다. 타인에게 온(恩)을 받는 것처럼 기리는 아주 괴로운 일이자 '본의 아닌 일’이다. 따라서 '기리 때문'이라는 표현은 일본인에게는 번거로운 관계를 나타내는 데 적합한 말이며 이런 이유로 일본말 중 ‘감사하다’라는 단어에는 온을 받아 마음이 편치 않다는 뜻도 포함된 경우가 많다. 기리에 몰린 사람은 어떻게든 그것을 갚아야 하며, 만약 온진(恩人)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기리의 규칙은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하는 갚음의 규칙이기 때문에, 초상집에서는 부조를 정확하기 기록한다. 또한, 돈을 빌리면 이자가 붙듯이 이 기리도 갚는 기한이 늦어질수록 커진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며, 이것은 서양인은 죄책감으로 윤리의 기본적인 틀을 짜듯 일본은 수치가 도덕의 기본이 되게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며 자신을 자제하고 동시에 자기방어적이다. 자신에게 수치를 준, 명예를 훼손시킨 자에게는 복수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그 분노는 자신으로 향해 자살해야 하는 일도 있다. 여기서 보복은 인간의 덕행이지 인간의 본질적인 약점에 기초한 피할 수 없는 악덕은 아니다. 또한, 이름에 대한 기리는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일본의 계층사회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이러한 점들은 일본 문학에서도 잘 나타난다. 베네딕트는 이러한 예로 「하치 야이기」, 「47인의 로닌」,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들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꼭 갚아야 하는 기리에 대한 중압감과 이름에 대한 기리에 상처받았을 때의 극단적인 예는 나쓰메 소세키의 『우미인초』에 더욱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고아이자 가난한 오노는 고도선생의 은혜를 받아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를 우등생으로 졸업해 천황에게 은시계까지 하사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스물일곱 살의 젊은이이다. 도쿄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오노는 결혼 상대로 교토에 있는 고도선생의 딸인 사요코가 아닌 자신의 장래를 위해 재력가이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후지오를 선택하기로 하지만, 친구 무네치카의 설득에 굴복해 출세를 포기하고 은사에 대한 기리를 선택한다. 그러나 오노에게 버림받은 후지오는 파혼된 것에 수치를 느끼고 그 분노를 자신에게 돌린다. 그것은 곧 자살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듯이 자살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과 기리를 지키는 명예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기리는 상황에 따른 현실주의적인 선택을 한다는 밝은 면도 있다. 1945년 항복과 그로 말미암은 강제적인 변화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경우가 그러하다. 전쟁으로 알맞은 위치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현명하게도 맥아더 원수는 일본인에게 굴욕을 주는 수단을 강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무력으로 뜻을 이루는 것은 잘못되고 명예롭지 않은 방법이라고 여기고는 이를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미국인 배척 법안을 만들게 하고 해군군축조약으로 크나큰 국가적 치욕으로 느끼게 하여 마침내는 그처럼 불행한 전쟁 계획으로 내몰게 한 것은 기리의 어두운 면이다. 그래서 항복 조건에 천황제 폐지가 없었던 것은 매우 중대한 의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베네딕트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어느 나라도 앞으로 10년간 군비를 갖추지 않는 나라는 군비를 갖추는 나라를 능가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기 때문에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장된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고 내다봄으로써 전후 서독과 일본의 경제 번영을 정확하게 예상하기도 했다.
일본은 패전 후 서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에 베네딕트가 인류학적 고찰로 밝혔던 일본의 보편적 특성이 현재에도 얼마나 남아 있는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국화와 칼』을 보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사상적 배경과 그 와중에 저지른 잔학무도한 범행의 문화적 동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난징 대학살과 위안부는 국가나 사회, 또는 가족에 대한 기무와 기리에 저촉되지 않는 한 마음껏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 허락된 일본 사회의 극단적인 경우를 본다. 그리고 베네딕트가 마지막에 지적했듯이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현재 일본은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앞으로 기후변화, 에너지와 식량 위기 등의 지구적 위기가 닥친다면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현재 일본의 의욕적인 재무장 추진은 우리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을 긴장시킬 수밖에 없다.
한국처럼 식량뿐만 아니라 에너지 자급자족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일본은 충분히 돌변할 소지가 있다. 이것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일본이 다시 군국주의 같은 힘의 논리로 돌아설 수 있으며 이때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돈, 기술력, 외교력 그리고 국민의 단결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때가 되면 일본은 기무와 기리가 지배했던 과거를 회상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의무와 의리는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일본은 효(孝)보다 충(忠)이 우선이었던 반면에 한국은 충보다 효가 우선이었다. 조선 시대 의병 활동을 하다가도 제사 지내러 갔던 의병장들의 기록은 우리를 얼마나 당황하게 하였던가.
누군가는 이 책을 보고 서양인이, 그것도 일본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학자가 일본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 것이냐고 힐문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무지의 오만은 『국화와 칼』을 몇 페이지라도 읽는 순간 꺾이리라고 나는 장담한다.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베네딕트의 글쓰기에 대해 “완벽한 설명 스타일이다. 절제되어 있고, 자신감에 넘치고, 보석을 세공하는 듯하고, 무엇보다도 단호하다. 단정적으로 표현된 단정적 견해”라고 평가했으며, 베네딕트의 연인이자 훌륭한 동료였던 마거릿 미드는 “아름다운 글쓰기 스타일, 폭넓은 인간성 이해” 등을 손꼽아 칭찬했다. 훌륭한 베네딕트의 글쓰기는 인간을 이해하는 인류학이라는 다소 어려운 학문을 어느 독자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일본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으며 그 이해는 지금까지 봐온 일본 문학이나 영화를 일본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줄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역자 서문」에는 “1930년부터 모교에서 인류학 교수로 재직했다.”라고 베네딕트의 이력을 설명하고 있지만, 베네딕트의 전기 『루스 베네딕트』(마거릿 미드, 옮긴이 이종인)을 보면 베네딕트의 스승 보아스가 그녀에게 컬럼비아대학의 조교수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 1931년이고 1937년이 되어서야 부교수로 승진했으며 정교수가 된 것은 1948년의 일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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