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30

유정 | 모든 것을 초월한 지고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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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초월한 지고한 사랑

질투와 오해의 앙상블이 빚어낸 비극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유정(有情)』은 한평생을 성실한 교육가로 살아온 중년의 최석이 친구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자 10년 넘게 자식처럼 키워온 남정임을 향한 뜻밖의 열정을 발견하고는 사회의 도덕적 관념에 어긋나는 그 열정을 이겨내기 위한 처절한 사투를 담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이다.

최석은 친구의 부탁으로 그의 아내와 여덟 살 난 딸 정임을 맡게 되지만, 친구의 아내 장씨는 최석이 기미년(1919)에 옥에 들어간 사이 죽고, 정임은 최석의 집으로 옮겨와 살게 된다. 그러나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정임은 최석의 큰 딸이자 정임과 동갑내기이면서도 얼굴은 못나고 공부도 별로인 순임에게 질투와 시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때문에 정임은 구박과 천대를 받으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눈칫밥 속에서 살게 되고, 최석 또한 순임에게서 옮아붙은 아내의 시기심과 질투 때문에 자주 부부싸움을 하는 등 가정불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가정불화는 고등 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정임이가 동경으로 유학하러 떠나고 나서야 끝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임이가 각혈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보를 받고 급하게 최석이 동경으로 떠나면서 잠시 잠들었던 아내의 질투심이 슬슬 깨어나는 듯하더니 최석의 아내가 심어놓은 밀정인 정임의 룸메이트가 정임의 일기장과 더불어 정임이 병원에 입원한 사연은 각혈이 아니라 낙태 때문이라는 청천벼락 같은 소식을 전해오고, 이 소식을 들은 최석의 아내는 질투심에 휩싸인 난폭한 짐승으로 돌변한다. 그녀는 창피도 무릅쓰고 동네방네에 대고 남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다. 이로 말미암아 최석과 남정임은 도덕상 추호도 용서할 수 없는 사회의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다.

정임의 일기장은 적막하고 절망적인 슬픔이 흐르고 있었으며, 오직 ‘그이’, 즉 최석을 향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불보다 더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최석의 아내가 오해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의 여자가 남자를 향한 육욕적인 저속한 사랑이 아니었다. 훗날 순임이가 깨닫듯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사랑. 오라비에 대한 누이의 사랑, 사내 친구에 대한 여자친구의 사랑, 애인에 대한 애인의 사랑, 이 밖에 존경하고 숭배하는 선생에 대한 제자의 사랑까지, 사랑의 모든 종류가 포함되어” 있는 순결하고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최석과 정임의 일이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학생들로부터는 ‘에로 교장’이라는 비난까지 받게 된 최석은 십오 년간의 교육자 생활을 마감하고 유산을 가족들에게 고루 남겨준 다음, 마지막으로 동경으로 가서 정임을 만나고 나서는 홀로 시베리아로 떠난다. 그리고 얼마 후 최석은 조선에 있는 친구 N에게 그동안의 사연을 구구절절 담은 편지를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에서 부친다. 편지를 읽고 최석의 진실함을 확신한 N은 최석의 아내와 맏딸 순임을 설득하고, 마음이 움직인 모녀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한탄한다. 그리고 아직 완쾌되지 않음에도 죽기 전에 최석을 한 번이라도 보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에 온 정임과 어느덧 사람이 된 순임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최석을 찾아 무작정 시베리아로 떠난다.

유정 | 모든 것을 초월한 지고한 사랑

소설 속 자유연애, 자유결혼을 몸소 실천했던 이광수

춘원 이광수는 아직 구시대적 관습이 아직 뿌리 깊게 남아있을 20세기 초 조선에서 남녀평등과 자유연애, 자유결혼 그리고 동성애를 자신의 작품을 통해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그의 생애를 통해서도 체현했다. 중매로 만난 백혜순과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낀 이광수는 백혜순과 합의 이혼하고,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과 결혼함으로써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실현한 것이다. 자신이 경험하기도 했던 애정 없이 결혼한 구시대적 결혼 관습의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는 작품 『무정』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형식의 친구 김병국 부부와 신우선 부부의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의무감으로 연명해나가는 불행한 가정생활을 통해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자유 사상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지지를 받았겠지만, 중장년층에게는 도덕적 타락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도덕과 사회적 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사랑만을 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정임은 자유연애의 끝이자 최고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려면 사회의 구속과 비난도 감수하는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남자가 자유롭게 만나 연애하고, 부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결혼한다는 이광수의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은 스승과 제자, 중년 남자와 젊은 처녀, 유부남과 처녀의 금지된 사랑 등 도덕적으로 용납받지 못했던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최석은 친구의 딸 정임을 친자식으로 여기고 기르고 가르치지만, 훗날 정임의 일기장을 통해서 정임이 자신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를 깨달으면서 깊은 번뇌에 빠진다. 평생을 교육자로서 윤리적으로 성실하게 살아오고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일절 가까이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중년 나이임에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 자신도 몰랐던 뜨거운 열정이 잠자고 있었고, 그것이 비로소 정임을 통해 깨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정임까지 불살라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 것 같던 그 지옥 불처럼 뜨거운 열정을 감당할 수 없었던 최석은 그 열정을 저지하기 위해 홀로 광활한 시베리아로 떠난다.

최석은 열차를 타고 바이칼호로 향하던 도중 F역 근처에서 자신처럼 도망 온 조선인 R을 만난다. R 역시 최석과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생이었고 그의 아내는 그가 가르치던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사회적 비난과 멸시를 피해 먼 시베리아로 도망을 와 죽을 각오로 황혼에 빛나는 두 별을 쫓아 무덤까지 만들었지만, 황량한 벌판을 정처 없이 떠돌며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떠오르는 해에 감흥을 받은 두 사람은 마음을 바꾸어 살기로 작정하고 부부가 되었다. 이에 대해 최석은 ‘그 두 별 무덤이 정말 R과 그 여학생과 두 사람이 영원히 달하지 못할 꿈을 안은 채로 깨끗하게 죽어서 묻친 무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R 부부의 변심에 대해 불만과 환멸을 느낀다. 자신의 억누를 수 없는 열정과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면서 죽을 각오까지 한 최석에게 비윤리적인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받아들인 R 부부의 삶에 대한 애착은 구차스럽고 비열하게 보였던 것이다.

유정 | 모든 것을 초월한 지고한 사랑
<이광수, 1929년,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이광수의 조선 비판의 연장선에 있는 ‘헬조선’

마지막으로 소설 『유정』에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 입각한 조선 비하성 글이 몇 장면 나오는데, 그중 한 장면을 살펴보자.

바이칼호로 향하던 최석이 F역에서 만난 조선인 R은 간도를 개척한 선친의 말을 담는다.

네. 내 선친은 혹 아실는지요. 선친의 말씀이 그러신단 말씀야요, 조선사람은 속이 좁아서 못 쓴다고. 정감록에도 그런 말이있다고 ─ 조선은 산이 많고 들이 좁아서 사람의 마음이 작어서 큰일 하기가 어렵고, 큰 사람이 나기가 어렵다고. 언만치 큰 사람이 나면 서로 시기해서 큰일 할 새가 없이 한다고 ─ 그렇게 정감록에 있다드군요. (『유정』, 「46」)

위키백과 이광수를 보면,

이광수는 늘 “(거짓말 잘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민족성을 개량하고 조선민족의 내실을 철저히 다지자”고 주장하였다. 이광수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게으름, 나태함, 안일함, 위선, 허례허식 등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와 일본처럼 근면함, 성실성, 진솔함,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몸에 익히고 생각을 바꿔야만이 독립의 첫 걸음을을 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의 요령과 술수, 시기심, 거짓말 등이 만연하다며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않고는 독립을 이룩할 수 없으며, 독립하더라도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없으리라고 봤다. (『위키백과』, 「이광수」)

이러한 견해에 대해 글의 논지나 맥락을 살피기보다는 현대의 난폭한 댓글 문화처럼 지나치게 감정적으로만 반응하면 마녀사냥이 이루어지기 쉽다. 여기에 ‘친일파’라는 감투까지 더해지면 본뜻이 와전될 수밖에 없다. 지금에 와서 이광수의 일생과 그의 작품들을 차분하게 다시 살펴보면 그가 왜 그 정도로 심하게 조선을 비하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제때 병을 고치지 못해 평생 고생했으며, 고아로 자라면서 이광수의 생모 충주 김 씨가 세 번째 부인이라는 점을 들어 서자로 취급당하고 무시당했고, 1919년 1월부터 국내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호소했지만 무시되었고, 국내에 보내는 선전 홍보물을 통해 국내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무지한 자들만 못하다, 배움의 의미를 알 수 없다며 안이한 지식인들에 대해 분노하였다. 여기에 생활고가 겹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에 무관심한 민중들의 무기력한 현실을 접하면서 실망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실망과 분노가 쌓이고 쌓여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민족개조론으로 마무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는 우리가 사는 데 너무 지치고, 사회에 너무 절망한 나머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비하하는 것과 이치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광수가 평가했던 조선인의 천박한 모습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감정적으로 동요된 사회에 직격탄을 던진 이광수의 용기가 무모했다면 무모했으리라. 하지만,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참된 용기를 이해하고 받아줄 아량이 부족한 사회에서 활약했다는 것 역시 그의 비극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 여전히 한국에서는 돈이 최우선이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돈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며 누구나 부를 획득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지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도 지켜지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온갖 부패와 부정이 판을 칠 수밖에 없고 약자는 더욱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비록 지금은 이광수가 살던 때보다 눈부신 경제 발전은 이루었지만, 그에 걸맞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수준 높은 의식이 빠진, 그야말로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매단 격이 된 우리 사회는 어느 교수의 말마따나 질이 나쁜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발악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국민의 정신적 성장이 경제 성장에 밀려 제자리걸음에 머물렀다. 그리고 배가 부른 지금, 그 누가 귀찮게끔 책을 가까이하겠는가. 책을 읽지 않는 민족,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민족, 그것은 기계화된 삶의 지름길로 가는 첫 관문이지 않을까?

지금의 우리 삶도 이광수의 눈으로 봐도 여전히 개탄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여운이 드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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