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6

다정검객무정검 | 검은 피를 흘리고 검객은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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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검객무정검 | 고룡 | 검은 피를 흘리고 검객은 눈물을 흘린다

인생살이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소설 속에서 갈래머리 손녀와 함께 강호를 떠도는 이야기꾼(說書人) 손 노인이 객잔에서 느긋하게 담배를 뻐금거리며 막 강호 이야기를 시작할라치면, 그때까진 거의 텅 비어 있던 객잔은 갑작스러운 손님들로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시끌벅적한 개인적인 담소들도 뚝 그친다. 객잔을 빈틈없이 채운 이들은 대부분이 강호와 연관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강호의 이야기에 자기 일처럼 귀를 곤두세운다.

이에 대해 또 한 명의 이야기꾼인 작중 화자는 강호의 일들이란 언제나 자극으로 넘쳐 있기 마련이었고 누구든지 그것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저마다 마음속에 크든 작든 억눌려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리라고 말한다. 객잔에 모여든 사람들이 강호 호걸들과 무림 기협들에 관한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 동일시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세속적인 슬픔과 고통으로 짓눌리고 찢긴 영혼이 흘린 피가 뭉치고 굳어 생긴 뻐근한 응어리를 한순간이나마 시원하게 풀어주는 약이 되기도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라고 이들보다 더 나은 것도 없는 것 같다. 성냥갑처럼 갑갑한 집,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지 않고는 하늘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이 들어선 빌딩 숲, 이런 빌딩 숲이 연출하는 위압감과 삭막함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마지못해 살아가는 우리는 무한 경쟁의 빠듯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복수와 원한, 야심으로 가득 찬 강호에서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둘 다 끊이지 않는 긴장의 연속으로 고단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며 패배와 죽음, 낙오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다만, 현대인은 돈을 흘리고 강호인은 피를 흘릴 뿐이다.

그래서 우린 손 노인의 이야기에 벌떼처럼 몰려드는 객잔의 손님들처럼 잊을만하면 무협지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샘 솟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사랑, 증오, 질투, 원한, 복수, 살인, 응징 등 사람을 지배하는 모든 원시적 감정을 아우르면서 통쾌하고 강렬하며 웅장하고 짜릿한 경험을 전해준다.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평소에 책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도 때론 무협지를 찾는다. 그만큼 무협지는 호소력이 있는 것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의 텁텁한 갈증을 해결해 주는 시원한 맥주,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잊게 해주는 따끈한 차 한잔처럼 무협지는 삶에 지친 나머지 피폐해지고 딱딱하게 굳은 우리의 마음을 한결 시원하고 부드럽게 풀어주면서 한시름 덜어주는 시원한 맥주이자 따끈한 차 한잔이다.

小李飞刀1: 多情剑客无情剑 by 古龙

첫 출수가 생사를 가늠한다

시리즈 소이비도(小李飛刀)의 첫 번째 편인 고룡(古龙)의 『다정검객무정검(多情劍客無情劍, 1968)』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심환(李尋歡)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다정한 검객’이자 ‘무정한 검’을 소유한 비상한 인물이다. 그의 비도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르고 매섭다. 그러나 그는 타인을 대신해 기꺼이 자신의 눈물과 피를 흘린다. 그는 남이 자신에게 폐를 끼치게는 할망정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못할 사람이며 자신이 남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묵인할 정도로 마음이 약하다. 이러한 그의 고결한 인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왕왕 눈물을 흘리게 하는데 바로 그것은 감동의 눈물이자 감격의 눈물이다.

총명한 소년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성장하면서 기인한 우연과 기연을 통해 새로운 무공을 익히고 연마함으로써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고수로 성장하여 의(義)를 행한다는 설정이 무협지의 전형적인 줄기이다. 그러나 『다정검객무정검』의 주인공 이심환은 이미 40세, 즉 중년의 나이로 소설에 등장하며 무공은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단계이다. 이심환의 친구이자 기이하게 빠른 검법의 소유자인 아비 역시 강호에 첫발을 디뎠을 때 이미 20대 초반의 젊은이며 그만의 독특한 무공도 어느 정도 완성된 단계이다. 또한, 무협지에 빠지지 않는 소재라고 할 수 있는 강호의 일대 사건인 비급을 두고 펼쳐지는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무공이나 비급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다. 그래서 무공 대결을 묘사하는 부분은 매우 간결하다. 주요 인물들의 무공 대결은 한 두 초식 안에 끝난다. 이렇게 말하니 좀 싱겁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묘미는 독자의 눈앞에서 난해한 무공 이름들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처럼 어지럽게 추는 비무(比武)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를 건 대결을 앞두고 첫 출수가 이루어지기까지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팽팽한 긴장감이다. 첫 출수의 실패는 패배로, 그리고 패배는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긴박한 순간을 간결한 필치로 단호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의 입안을 바짝바짝 마르게 한다. 더불어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무쌍한 사건 전개도 이 책을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변수이다.

마치면서...

소설 『다정검객무정검』은 부정할 수 없는 무협지지만 ‘무공’ 그 자체에 비중을 두기보단 천편일률적인 선과 악의 구분을 경멸하는 심도 있는 성격과 인간성을 지닌 영웅들의 복잡다단한 인간사를 그려냄으로써 기존의 무협지의 틀을 벗어남과 동시에 하늘과 땅, 끝이 있을망정 이 한(恨)은 그칠 날이 없는 강호 세계의 비정한 인간사를 완성한 특색 있는 무협지다.

다른 사람이 베푼 은혜를 잊기란 매우 쉬운 일인 듯하나 다른 사람이 진 원한을 잊기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엔 근심이 늘 기쁨보다 많은 법이었다. 『다정검객무정검(多情劍客無情劍, 196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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