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 앨런 바너드 | 패러다임의 변화를 한 눈에
앨런 바너드(Alan Barnard)의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History and Theory in Anthropology)』은 인류학의 토대가 형성되었던 17세기 • 18세기 계몽 시대의 자연법과 인류학의 시발점이 된 사회계약 이론을 시작으로 인류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 자리를 잡은 19세기 중반을 거쳐 현재까지 등장했던 모든 인류학 이론의 역사를 요약한 개론서이다. 앨런 바너드의 인류학 이론 강좌를 위한 강의 노트에서 시작한 이 개론서는 인류학 이론에 관한 논쟁들을 사상의 역사, 국가별 전통과 학파의 발달, 개별적 인류학자들과 그들이 인류학에 도입한 새로운 시각 등의 측면에서 여러모로 검토했다. 이로써 “인류학 이론을 최대한 다양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리라고 생각되는 독특하지만 절충적인 접근법이 탄생”했는데, 이러한 저자의 목적은 “각자 나름대로의 가정과 의문을 가진 인류학자들의 관심이 수렴되고 분기되는 현상을 배경으로 인류학 이론이 발달하는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인류학 기초가 되는 이론을 정립한 루소나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 시대 사상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성립한 진화론,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진화론의 압도적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인류학자에게 제공한 전파론, 전파론이 미국 인류학으로 스며들어 변형된 문화영역 이론,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저술을 통해 인류학적 시각으로 확고히 정립된 기능주의와 구조기능주의, 20세기 전반부 미국 인류학의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던 보아스의 상대주의, 1950년대 이후 형식적이고 사회중심적인 구조기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보다 개인적이고 행위중심적인 인류학을 추구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난 행위와 과정에 중심을 둔 접근 방법과 『자본론』 제1권에 표현된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초한 생산양식을 중요 개념으로 채택한 마르크스주의 인류학, 내용보다 형태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이론적 시각인 구조주의와 형식적 틀을 고집하는 기능주의와 구조주의에서 벗어나 문화와 사회적 행위의 관계를 좀 더 유연하고 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후기구조주의와 여성주의, 인류학이 과학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인류학을 인문학으로 정립시키고자 시도한 해석주의와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든 ‘근대적’ 이해를 비판하듯 인류학의 거대이론과 민족지 기술의 완결성이란 관념을 모두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인류학 등 실로 광범위한 이론과 그 배경을 개괄하면서 동시에 무수히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앨런 바너드는 부록에 인류학 용어에 대한 설명과 함께 본문에 언급된 거의 모든 학자의 생몰년을 부록에 포함하면서 여기에 빠진 소수 인물은 주로 아직 살아있는 비교적 젊은 인류학자들이라고 밝혔는데, 내가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문화의 패턴』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 역시 보아스의 상대주의 이론을 설명할 때 등장한다.
바너드는 결론 장에서 현재 인류학의 흐름에 대해 오늘날 많은 인류학자는 하나 이상의 패러다임에 속하며, 둘 이상의 패러다임을 섞는 이들도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곧 패러다임이 없는 것이 현재의 패러다임이라는 뜻으로도 풀어볼 수가 있다. 하나의 이론에서 벗어나 상황에 따라 여러 이론을 적절하게 고려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진 국경을 넘어선 이론 간의 원활한 소통 덕분일 것이다. 학자들 간의 상대적 거리가 가까워지고, 학문적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이론적 반목도 줄어든 것이 학자의 융통성과 학문의 포용력을 넓이는 데 일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인류학이나 관련 학문을 전공하거나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가 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류학 이론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은 방대한 분량의 논문들을 단 몇 줄로 요약한 것이기에 사전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실례로 본문 8장에 나오는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구조』는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것은 단 몇 페이지로 요약했으니 실로 엄청난 축약이다. 그나마 나는 『문화의 패턴』 덕분에 보아스와 베네딕트가 등장하는 상대주의 이론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History and Theory in Anthropology)』은 어떤 특정한 인류학 이론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다양한 인류학 이론들의 대략적인 개요와 그 이론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그로 말미암은 인류학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서로 다른 이론 간의 상호작용 등 인류학 이론의 변천 과정에 중점을 둔 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책을 선택함에 흥미로운 예증으로 문화의 상대성을 누구라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문화의 패턴』 같은 인류학 고전을 떠올려서는 안 되며, 저자 앨런 바너드가 이 책은 인류학 이론 강좌를 위한 강의 노트에서 시작했다고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대학 교재의 그 딱딱함을 상상하면 어떤 책인지 쉽게 감이 잡힐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인류학 이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자신이 아는 인류학 이론과 그 이론을 반영하는 조각들을 책장을 좀 더 가볍게 넘기면서 책의 구성에 맞추어 머릿속에서 자유자재로 끼워 맞출 수 있다면 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인류학 이론사의 큰 그림을 좀 더 쉽게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학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나 인류의 보편적 특성을 이해하려고 할 때 유용한 학문이다. (『인류학의 역사와 이론』, p7)
0 comments:
댓글 쓰기
댓글은 검토 후 게재됩니다.
본문이나 댓글을 정독하신 후 신중히 작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