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을 쓰고. 이 모든 것을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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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4일 월요일

[책 리뷰] 분단의 고통, 재통일의 혼란? ~ 심플 스토리(잉고 슐체)

분단의 고통, 재통일의 혼란

원제: Simple Storys: Ein Roman aus der ostdeutschen Provinz by Ingo Schulze

릿속이 뒤죽박죽 어질러진 느낌이랄까? 특별히 선택된 주인공은 없고, 따지고 보면 실제 우리들의 보통 사람들의 인생처럼 등장인물 하나하나 모두가 주인공 같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고 그런 면에서 기존의 소설 읽기 방식으로는 매끄럽게 읽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특별한 구성이 없는 자유분방하고 형식에 얽매지지 않는 구성으로 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각자의 독특한 시점과 개인의 개성이 물씬 풍기오는 독특한 말투로 풀어나가는 이 모든 일화가 이 소설만이 가진 유별난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독특한 문체와 서술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이 가진 고민과 두려움 등 통일 독일 전후로 동독 시민이 가지고 있던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표면화시키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만, 그 방식이 다른 소설들처럼 작가의 직접적인 서술이나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야반도주하듯 은밀히 내비치고 있다. 『심플 스토리(Simple Storys by Ingo Schulze』 초반부에는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등장인물들 간의 수다스러움의 연막 사이로 가려져 있다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이들이 겪고 있던 폭력배들의 이유 없는 횡포, 실업문제, 재통일로 말미암은 동독 시민의 호황에 대한 기대와 실망, 한국이 일본강점기 후 겪었던 친일파 문제처럼 과거 동독 시절 비밀경찰 요원이나 고위 간부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처신이나 기타 정치적, 사상적 문제 등 이런저런 문제점들과 그 때문인 고뇌와 혼란을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도 독일 통일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었고, 잉고 슐체가 친절하게 풀이해 주는 구성이 아니라 앞에서 말했듯이 오로지 각 개인 간의 사적인 만남과 대화 속에 문제점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아직도 내 머리는 혼란스러울 뿐이다.

를 들어 제니의 경우를 들여다보면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마이크와 연애를 하면서도 어느 한 중년 남자의 조건 없는 애정과 돈을 받게 된다. 제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이크와 잦은 말다툼을 하게 되고, 제니와 마이크를 잠시 보살펴주던 리디아의 눈에는 제니의 언동이 철부지 소녀로만 비추어진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같이 일용직 근무자로 일했던 개구리 복장의 마르틴 앞에서 좀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앞날에 자그마한 희망의 빛을 밝혀준다.

여기서 제니에게 돈을 주는 중년 남자는 낚시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는 디터였고, 그 후 디터가 제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디터의 아내 마리안네가 제니를 만나게 되고, 제니와 마이크를 위해 선심을 쓰는 에드가도 만난다. 이런 식으로 리디아, 디터, 마리안네, 에드가 등등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들을 엮어 가면서도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등장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 얽히고 부대낀다. 그러면서 결코 심플하지만은 않은 '심플 스토리'를 만들어 나간다. 아마도 그 스토리는 '네버 앤딩 스토리'로 이어지지 않을까.

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서로 경제적 규모와 사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국가 간의 급작스러운 재통일이 가져오는 문제점들과 혼란의 모습은, 분단의 고통을 아직도 고스란히 겪는 우리에겐 정말 귀중한 교훈과 따끔한 충고가 아닐 수 없다.

이 리뷰는 2012년 05월 14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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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9일 수요일

[책 리뷰] 자기모순적 소년의 성장이 잉태한 성찰의 고귀함 ~ 유년시절(톨스토이)

자기모순적 소년의 성장이 잉태한 성찰의 고귀함

원제: Отрочество(Boyhood) by Leo Tolstoy

래는 유년시절, 소년시절, 청년시절 3부작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도서관 책장을 뒤지다 눈에 띄어 별생각 없이 대출해놓고 보니 예전에 대출한 적이 있었던 책이다. 다만, 출판사만 달랐다. 워낙 오래전에 봤던 작품이라 그런지 감흥은 고사하고 처음으로 대면하는 느낌으로 읽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읽고 나니 언젠가 한번 읽은 듯한, 너무나 아득하고 희미한 기억이라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각 에피소드 중간마다 약간의 친근감을 찾을 수 있었다.

품 『유년시절』 속으로 들어가 보면 크게 줄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작가의 자서전적인 어린 시절의 회상으로서,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는 않지만 니콜레니카라는 작가를 상징하는 소년의 솔직 담백한 시선과 마음을 통하여 그날그날의 일상적인 삶의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심플 스토리』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하지만, 단순하고도 평범한 이야기에서 시적인 감흥과 예술적 성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가의 천부적인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소년의 10살 무렵에서 대학 입학하고 2학년 진급 시험에 낙제하는 16살까지 기록된 이 작품의 전체적 의도는 『장년시절』이 포함된 4부작으로 계획된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마지막 부분은 완성되지 못한 채 작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청년시절』의 마지막 장에서 니콜레니카는 낙제를 경험함으로써 교만했던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새로운 규칙도 배반하지 않겠고 다짐하는 장면에서 마무리되는 점과 실제 그 시기에 작가의 삶을 회상해 본다면 미완성 된 부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어느 정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단순하고도 깊이와 아름다움이 있는 이 작품에 대해 지금까지 떠든 내용만으로도 부끄럽고 고개가 숙여지지만, 꼭 한 번쯤 읽어야 할 너무나도 좋은 작품이기에 조금 더 생각나는 데로 적어보기로 하자. 그럼 왜 이 작품을 읽어야 하고 우리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몇 자 적어 보면,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위대한 작가의 꾸밈없고 숨김없는 어린 시절을 볼 수 있다.

아름답고 한적한 시골 영지에서 공상과 상상 속에서 자란 철없던 소년에게 대학 준비를 위해 모스크바로 이주하고 새 친구들을 만나는 새로운 경험은 내면의 성장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를 통해 소년은 ‘예의 바른 인간’, 즉 도적적 완성을 향한 이상을 가지게 되는 동시에 실생활에서는 오만하고 거만한 행동과 언행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청년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내재한 선과 악의 공존과 갈등의 모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적나라하고 엄격한 자기비판을 통한 자기성찰의 과정은 이 작품을 예술적 완성으로 도달할 수 있게 한 점이 아닌가 싶다. 겉으로는 거만하고 허영으로 가득 찬 모습이지만 사실은 순진하고 솔직한 내성적인 소년의 내면은 도덕적 이상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이 끓어오르는 활화산과 다름없다. 이렇게 자기모순적인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이상과 행위의 불일치로 말미암은 낙심과 회의, 성찰을 통해 독자들도 뭔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유년시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여기서부터는 잡담으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나름대로, 어설픈 지식을 총동원하여 한국에 톨스토이 문학이 다른 서구작가들보다 빨리 알려지고 정착하게 된 계기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일단 한국의 해방 전 근대문학 작품을 읽게 되면 많이 거론되는 작가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다. 해방 전 작품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혹은 지식인들이나 좀 배웠다고 하는 인물들이 알은 채 하고자 거론하는 작가나 작품으로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혹은 그들의 작품들이 등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해방 전 이미 어느 정도 알려졌던 것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당시 일본에서 사회주의 열풍으로 러시아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러시아 문학도 같이 일본에 넘어왔을 테고, 일본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나 사회주의 작가들의 영향으로 조선 사회에 소개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미 조선도 카프의 결성으로 사회주의 흐름을 타고 있었던 만큼 젊은 청년들이나 지식인들에게 10월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는 동경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러시아 작가들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그 흐름의 하나였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내가 아는 대로 한 번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가 7살 많은 형이었지만, 둘 사이에 교제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톨스토이는 백작 집안의 귀족으로 태어났고, 도스토옙스키는 의사 아들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까지 가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톨스토이가 크게 상심했다고 한 것을 보면 톨스토이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작가의 명성을 생각하면 도스토옙스키의 가난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실제 그 시기에는 도스토옙스키보다는 톨스토이가 대중적인 작가로 크게 성공했었고, 그 차이는 원고료로도 쉽게 비교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프스까야가 지은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을 보면 톨스토이는 인쇄 지면 한 페이지당 200루블 정도의 고료를 받았고, 도스토옙스키는 절반도 안 되는 50루블 정도밖에 못 받았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생각보다 적게 받았던 이유는 그 시대의 비평가들이나 편집자들에게 크게 인정을 못 받은 것과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일, 그 이후 계속된 실패와 자신의 경제적 사정을 알고 있던 편집자들의 횡포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또한,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에 이미 방탕한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자신의 도덕적 이상의 완성을 위한 선구적인 길을 간 반면에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의 늪에서 늦은 시기까지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나마 말년에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헌신적인 아내 안나 덕분에 사후에야 모든 빚을 갚았다고 한다.

두 거장의 작품을 생산하는 스타일도 판이하게 틀리다. 톨스토이는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글을 쓰고 꼼꼼하게 교정하는 노력형이라고 볼 수 있고, 반면에 항상 마감과 돈에 쫓겼던 도스토옙스키는 한 번 솟아난 영감으로 한 작품 전체를 구술해 버리고 나서는 일절 돌아보지 않는(항상 쫓기다 보니 교정할 시간도 없었겠지만) 천재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리뷰는 2012년 05월 09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약간의 수정만 거친 다음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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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5일 토요일

[책 리뷰] 보이지만 뛰어넘지 않는 울타리에 갇힌 삶에서 미래란… ~ 나를 보내지마(가즈오 이시구로)

보이지만 뛰어넘지 않는 울타리에 갇힌 삶에서 미래란……

원제: Never Let Me Go by Kazuo Ishiguro

일셤(Hailsham) 출신의 31살의 캐시. 11년 동안 간병사로 살아오면서 간병사로는 보기 드물게 스스로 원하는 환자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함을 인정받아 온 그녀는 간병사로서의 삶을 몇 개월 남겨 두고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헤일셤. 그곳은 그녀가 유아시절부터 16세가 되어 학교를 떠날 때까지 소중하지만, 의문으로 가득 찬 추억을 남겨준 곳이었다. 그리고 더없이 소중했던 친구 토미와 루스가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마담의 화랑에 간 작품이 하나도 없었을 정도로 창조와는 거리가 멀었던 토미. 천진하고 덩치가 컸던 토미는 분위기 파악에 언제나 한 박자 늦어지는 무디고 미련한 감각으로 놀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놀림을 받으면 통제하지 못하는 발작적인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자신을 내버려온 토미는 제럴딘 선생님의 미술 시간에 장난삼아 그린 '풀밭 위의 코끼리' 그림을 시발점으로 확실하게 학생들의 놀림감이 되어 간다.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선생님의 과도한 친절과 배려로 실제로 그림의 잘된 점을 칭찬하자 아이들의 분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열세 살이었던 상급반 2학년 때는 토미에 대한 박해가 절정에 달했지만, ‘꼭 창의적일 필요 없다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우리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는’ 루시 선생님의 고백 같던 조언을 토미가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후 조롱을 당하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고 박해는 점점 사라져갔다. 토미는 변했고,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면서 자신의 말은 실수였다고, 잊어버리라고 말하던 루시 선생님. 훌륭한 그림이 하나의 증거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그렇게 헤일셤을 떠났다.

암시쟁이 루스는 아는 척하는 것을 좋아하고 변덕이나 화가 풀릴 때는 호들갑을 떨며 화를 낸 상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기분파였다. 가식적인 그녀는 길에 떨어져 있던 잡지의 광고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은 희망을 품으면서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언제나 사태를 있는 그대로 믿고 싶어하는 루스와 보이는 모습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에 이끌리는 ‘나’와의 갈등과 화해의 반복은 이들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다듬어져 가는 내면의 성숙에 필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했으리라.

루스의 임종을 얼마 안 남겨두었을 때 토미와 루스 '나', 이렇게 셋이서 늪에 좌초된 낡은 낚싯배의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나’에게 지난날의 잘못을 회상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가장 소중한 선물을 남기고 떠나는 쓸쓸하고 공허해 보였던 루스의 모습과 지난날 당당하고도 오만했던 그녀의 모습에서 모순보다는 두 모습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그녀에게만 간직되어 있었던 아득하고도 아련한 아지랑이 같은 서글픈 기억의 한 조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헤일셤에서 유일하게 외부의 물건을 구할 수 있었던 판매회와 학생들의 창조적인 작품들을 서로 교환할 수 있었던 교환회 이야기. 그리고 그 뒤에 공식적으로, 하지만 비공개적으로 감춰져 있던 의문의 그림자들과 어렴풋이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는 있지만, 그 누구도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가슴에 담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모든 궁금증은 마지막 루스의 유언대로 ‘나’와 토미가 마담의 집을 방문하면서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헤칠 한 가닥의 빛을 만나게 된다.

리는 지금 당장 잊고 싶은 고통스럽고 슬픈 기억과 함께 영원히 죽는 그날까지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그 모든 걸 기억하는 상태로 살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게 모든 걸 마음과 머릿속에 넣어두고 산다면 정말 하루도 못 가서 미쳐버리지도 모르는 일이다.

뜻하지 않게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두운 과거, 잠시 회상하다가 잊혀 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 마음의 위안을 위해 꺼내어 되새겨 보는 소중하고 따뜻했던 추억 등 우리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기억의 파편들과 조각들로 뒤죽박죽 되어 있지만, 그것을 정리할 새도 없이 매일 새로 각인된 따끈따끈한 조각들을 공급받는다. 우리는 영영 정리될 것 같지 않은 기억의 조각들을 그렇게 뒤에 남겨둔 채 막연한 새 희망을 품고 내일을 맞이하게 된다. 어제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기억의 조각들은 조각에서 파편으로, 그리고 그 파편에서 차갑게 식은 가루로 부서지는 망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희미한 기억의 가루들은 영영 찾지 못할 깊은 어둠의 심연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고, 아직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들과 파편들은 우리 인식 속에 공존토록 붙잡아 놓아 현재의 기억들과 '나'를 지탱해준다.

주인공 캐시는 그런 망각의 가루들을 하나하나 긁어모아 하나의 파편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거기에 몇 개의 파편을 이어 붙어 하나의 완벽한 조각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런 파편과 가루 중에는 ‘기증’, ‘근원자’, ‘일반인’, ‘복제’, ‘장기’……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SF적인 호기심을 불러내지만, 그 내용은 전혀 SF 적이지 않기에 혹시라도 영화 <아일랜드> 를 연상시키면서(나도 조금은 그러했지만) 이 작품을 선택한다면 크나큰 실수임을 미리 지적해 주고자 한다.

가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를 읽으면서 받은 굵직한 느낌을 말하라면 역시 ‘인간의 오만함’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스스로, 또는 다른 짝과 함께 무작위적인 복제를 해왔고, 그 복제는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역사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미 과학계 정설로 자리 잡은 진화론적인(진화론 자체는 교황이나 다른 대주교들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들은 그 시작을 신의 의도로 보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한 핏줄이고 그렇기에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다른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 거고,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면 다른 동물에게도 영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대부분은 그들이 인간에게는 저능하게 보이는 다른 동물들과 한 핏줄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해왔고, 그런 와중에 다른 동물들과 인간과의 여러 차이점을 강조하게 되면서,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으로 영혼을 들먹인다. (사실 개와 인간의 차이점만큼이나 같은 점도 많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를 보내지마』에서도 역시 영혼은 중요한 문제이다. 근원자들이나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생명 연장을 위한 복제 시스템의 뒷얘기나 참모습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그들이 도축되는 과정을 상상하거나 그런 사실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설령 그 끔찍하고 불행한 그들의 사육 시스템과 도축 과정을 TV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알게 된다고 해도, 곧 잊거나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불편한 진실을 보고 생각을 고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아주 극히 드물다. 마트에서 고기 세일만 하면 저녁 시간이 다가오기도 전에 동나는 걸 보면 그 이유를 알고도 남을 것이다. 들었으되 듣지 않은, 보았으되 보지 않은…. 우리의 오만함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튼, 그러한 시스템에 반기를 들고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헤일셤의 교환회가 등장하고 그들에게도 창조적인 작품을 통해 내면의 모습, 즉 영혼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그들도 자신들과 같은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고자 노력하게 된다. 에밀리 교장이 이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 처음에는 많은 정치가나 유력자, 그리고 일반인들에게서 호응을 얻어내는 듯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사람들은 그들이, 즉 복제자들이 자신들보다 뛰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다시 등을 돌리게 되고 이렇게 지원이 끊어지게 된 헤일셤은 폐교하게 된다. 하지만, 에밀리 교장은 복제자들이 일반인들과 같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진실의 증명 여부에서 더 나아가 근본적인 복제 문제를 거론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운영하는 가축 사육 시스템에서도 가축들이 태어나 도축으로 이르기까지의 삶의 환경이나 도축 과정의 개선을 위해서는 많은 이들이 큰 소리를 내지만, 정작 문제가 도축의 허용 여부에 대한 문제에 이르러서는 그 목소리들이 현저히 작아지는 우리의 현실과 별다를 바가 없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 가축을 사육하고 역시 필요해 의해 그 사육되는 가축들의 종류에 ‘복제자’를, 이 작품에서처럼 하나 더 추가한 것뿐이다. 몇 년 전에 SBS TV 동물농장에서 사육장에 갇힌 상태로 버려진 개들을 찾아냈던 방송이 기억난다. 대부분의 수십 마리의 개들은 굶어 죽은 상태였지만, 그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몇 개들은 옆에 죽은 동료의 주검에 입을 대기는커녕, 동물협회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자 이미 오래전에 굶어 죽어서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 쓰려져 있는 동료의 주검에 다가가 입으로 물어 일으켜 세우면서 마치, "여기 먹을 것이 있으니 같이 먹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물겨운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서는 같은 동료를 먹는 걸 당연한 걸로 여기게 하는, 인간만의 점유물이라고 하는 지능의 상징인 '이성'. 더 나아가 식욕의 만족을 위해 인육을 먹는 인간들의 빛나는 문화. 앞에 언급한 개들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본능적으로 동료의 시체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인간도 이처럼 본능적으로는 거부할지는 몰라도 이성적으로는 먹어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살아남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간사의 잔혹한 역사는 너무 도가 지나치다. 왜냐면 인간은 생명의 근원인 자연과 지구를 파괴하면서까지도 인류의 행복과 번식을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 아래 모든 걸 정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달려가다 지구가 황폐해져 더는 바다에서조차 생명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더라도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그 잘난 '이성'이 끔찍한 전쟁과 학살의 근본 원인이라고 한다면 너무 억측일까. 정말 다른 동물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인간이다.

간은 스스로 지구 최고의 생명체라고 자부하지만, 그 자축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최고의 생명체가 무엇을 기준으로 정의되느냐에 따라 답은 틀리기 때문이다. 만약 그 종이 지구에서 생존했던 기간을 우선으로 보자면 인간은 순위에서 밑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단연컨대 살아남는다는 사실만 보면 지능만이 최고는 아니다. 공룡이 1억 6천만 년 이상 지구에서 생존했던 사실을 잊지 말자. 또한, 작은 랍토르류의 후손인 조류가 아직 건재하고 있고, 영장류는 5,500만 년, 호미니드 사촌은 700만 년, 인간은 고작 20만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만약 6,550만 년 전에 운석 대충돌로 공룡이 멸종되지 않았더라면 그 당시 쥐새끼 정도에 불과했던 포유류는 지금까지 그 상태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능은 생존에도 도움이 되지만, 멸종에도(자기 종이든 다른 종이든) 도움이 된다는(인간이 만들어낸 다양하고 놀라운 무기들을 보라. 거기에 생화학이나 바이러스 무기들을 보탠다면 정말 금상첨화이다) 동전의 양면성과 지능이 높다고 해서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 아닌가.

소설 『나를 보내지마』에서 일반인들의 복제자들에 대한 시선은 당연히 곱지 않다. 혐오스러운 동물이나 거미 같은 곤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반면에 주인공들을 포함한 복제자들은 이러한 도구적이고 제한된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이의 없이 받아들인다. 단지 그 제한된 삶에서나마 좀 더 다른 것들을 얻으려고 투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감옥에서의 제소자들이 감옥 안에서의 여러 불편부당한 점에 대해서는 크고 작은 마찰들을 일으키지만, 감옥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작가가 복제 문제를 다룬다기보다는 일반인들의 이기심에 따라 만들어진 또 다른 인간의 세계라고 볼 수 있는 복제자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연장 꿈을 실현하기 위해 복제자들을 생산 및 사육하는 것처럼 그들이 절실히 필요한 건 오히려 일반인들이지만, 그런 일반인들의 부당한 대우와 불쾌한 시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반면에 그들을 이렇게 만든 일반인들을 탓하지 않고 모든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복제자들. 아마도 그것은 막연하고 불안한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복제자들에게도 희망을 품게 하고 나름대로 꿈도 가지게 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대로 성장하고 그런대로 적응해서 예전의 꿈들은 체념과 낙담으로 대체되고 그럭저럭 기증자로서 선택받은 삶을 살아가지만, 주인공 '나'와 그녀의 친구들은 과감히 거기에 도전장을 내민다. ‘도전’이라는 거창한 단어에 걸맞지 않게 매우 축소적이고 협소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들은 체념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일까. 루스의 바람대로 마담을 방문하고 예전 헤일셤 교장을 만나고 그제야 그들은 '들었으되 듣지 않은' 지난날의 과거를 회상하며 다른 동료처럼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게 된다.

헤일셤 시절의 무수한 소문 중 하나인 전국의 모든 분실물이 모여 있을 거라고 여겨지던 영국의 로스트 코너 노퍼크. 또한, 헤일셤 시절 잃어버린 카세트테이프를 토미와 함께 찾아낸 곳이기도 한 곳. 주인공 '나'는 토미가 죽은 후 노퍼크를 찾아가 파도에 밀려와 해변 경작지 주변 철망에 걸려 있던 많은 잡동사니를 보면서 토미를 회상하는 장면은 다른 복제자들과 달리 '나'는 체념과 침묵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들었으되 듣지 않은’ 라는 말에 ‘보았으되 보지 않은’이라는 문구도 보태어 인간의 어리석은 오만함과 난폭한 이기심이 인간을 어디까지 끌고 왔고 앞으로 어디까지 몰고 갈지 한번 상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지구에서 영원한 종은 없다. 우리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도 언젠가는 한 줌의 흙이 되어 다른 생명의 발바닥에 묻히고 말 것이다. 내가 너무 회의적이고 염세적인가. 매일 TV와 핸드폰, 컴퓨터에 매달려서 생각 없이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가끔은 이런 과학과 문명에 대해 회의와 염세에 빠져보는 것도 정신적 성장을 위해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리뷰는 2012년 05월 05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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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일 화요일

[책 리뷰] '위선’을 읽다 ~ 톰 존스(헨리 필딩)

'위선’을 읽다

원제: 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 by Henry Fielding

리 필딩의 『톰 존스(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 by Henry Fielding)』는 따로 추천사가 필요없는 고전 명작이다.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은 어느 세대에게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나 화두를 내놓기에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인정받고 사랑받는다고 한다면, 헬리 필딩의 『톰 존스』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심오한 한마디를 선뜻 내뱉는가 하면, 철학자들이나 다룰 법한 고리타분한 재료를 가지고 여러 요리를 선보일 거라는 예시, 그리고 신물 나게 덕성을 강조하는 작가의 주장을 독자는 서두에서부터 마주치게 된다. 얼핏 말 많은 목사처럼 도덕과 양심, 윤리를 강조하고 설교하는 고루하고 따분한 내용은 아닐까 걱정이 들 수도 있지만,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어느 정도 책을 읽고 나면 『톰 존스』가 18세기에 쓰인 책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품에서 표출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다양한 요리들은 현대인의 삶에 풍부한 영양분을 제공해 준다는 걸 깨닫게 된다. 각 권 앞에 있는 서론들은 건너 띄고 읽어도 무방하겠지만, 마음의 양식을 뛰어넘어 뭔가 더 얻고 싶은 독자라면 지루하더라도 한 번쯤은 꼭 읽어봐도 손해 볼 것은 없다.

딩이 요리해 주는 다양한 인간 본성 중에서도 '위선'은 메인 메뉴로 등장한다. 위선 또는, '가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닌 그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사회의 각종 조직 속에서 접하게 되는 의무적이고 가식적인 친절. 부모 앞에서는 착한 아이나 학생처럼 행동하고, 타인 앞에서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 직장에서는 괜찮은 직원, 또는 인정 많은 상사라는 말을 듣지만, 막상 집에서는 독재자처럼 군림하려는 아버지나 남편들. 헨리 필딩은 그런 위선을 '괴물', '혐오스러운 악'이라고 평가하지만, 현대인들은 처세술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로 덮어버린다. 친구 앞에서 행동이 다르고, 또 직장 동료 앞에서 행동이 다르고, 집에서의 행동이 다르다면 이 중에서 우리의 진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만약 배우자를 선택한다면 어떤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할까. 위선이 일상화된 요즘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진짜 모습은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탐욕과 야망 속에 삼켜져 버린다. 어찌 되었든 분명한 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위험한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렇다면 조심하게 접근하거나 되도록 피해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품은 진짜 의도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이나 분별력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한 권의 책이 이 모든 걸 충족시켜 줄 수는 없지만, 인간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시간만큼은 충분히 제공해 줄 것이다.

지막으로 출판물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세종대왕처럼 죽을 때까지 책 속에 파묻혀 살아도 이 세상에 출판된 모든 책 중에서 극히 일부분의 책만을 읽을 수 있다. 고로 한 권을 읽는 시간이라도 낭비하지 않으려면 신중을 기해 책을 선택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난 최근의 출판된 작품보다는 시간의 무게를 이겨낸 고전이나 근대문학을 더 선호한다. 물론 현대문학에서도 『톰 존스』처럼 명작으로 남을 작품들이 나오겠지만, 그런 명작은 공장에서 찍어대는 상품처럼 매년 쏟아지는 책 중에서 불과 몇 작품 안될 것이고, 그런 작품을 판단하고 찾아내기에는 나의 안목이나 능력이 많이 모자라다.

이 리뷰는 2012년 05월 01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것을
특별한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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